_파울루 벤투 감독
“아니, 도대체 어떻게 관리를 하는 거죠?”
내가 벤투 감독을 처음으로 진료하고 나서 한 말이다. 그동안 몸 관리를 꽤 잘하는 선수들을 만나봤지만 모든 수치가 그처럼 표준에 가까운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FM(Field Manual)의 약자. 군대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현장 매뉴얼처럼 원칙 그 자체라는 의미, 표준 중에서 진짜 표준. 벤투 감독에 대한 첫 정보는 이렇게 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와 내가 진료실에서 만난 이유는 감독 부인의 진료 때문이었는데, 2020년 6월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브란스 병원은 2019년 10월에 KFA와 협력병원 협약을 체결했으며, 이에 따라 KFA에서 의뢰한 KFA 관계자들의 진료를 담당하고 있다. 윤영설 당시 의무분과위원장을 통해 벤투 감독 부인의 진료 요청이 들어왔다. 내가 세브란스 병원 건강검진센터도 담당하고 있어 윤 위원장이 감독 부인의 진료 및 검진에 대한 전반적인 과정을 맡긴 것이다. 그때 부인을 동행한 벤투 감독은 자신의 건강 상태 역시 살펴봐달라고 요청했다.
잘 알려진 대로 벤투 감독은 포르투갈 국가대표 선수 출신 감독이다. 우리나라 축구 A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한 것은 2018년 8월 23일이다. 그때만 해도 그와 제대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2019년에 레바논 현지에서 만났으나, 국가대표팀 팀닥터가 아니라 AFC 메디컬 오피서로서 간 데다가 분위기가 안 좋았기 때문에 잠깐 인사만 나눴다.
진료실에서 마주한 그의 몸 상태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건강했다. 정말 많은 환자들을 20년 가까이 봐왔으나 벤투 감독 같은 검진 결과를 본 적이 별로 없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이 상해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스스로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수치상으로’ 건강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는 겉과 속 모두 일관된 FM이었다. 자기관리가 얼마나 철저한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와 부인의 건강 관리를 위해 이것저것 자세히 안내해 주었다. 감독이 편안해야 궁극적으로 우리 국가대표팀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 조목조목 짚어주고 이것저것 떠들어댔다. ‘이방인’인 그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고픈 마음도 십분 작용한 것 같다. 이후 나는 감독 가족의 주치의가 되었다. 벤투 감독의 스태프 가족의 진료도 이어졌다. 진료실에서 건강 외에 사적인 이슈를 편하게 이야기하면서 차츰 인간적인 라포(Rapport)가 쌓여갔다.
2020년 10월 A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과의 친선경기가 열렸다. 나는 이때 올림픽대표팀 팀닥터로 경기장에 있었는데, 벤투 감독이 스스럼없이 찾아와 “Doctor! How are you?”하고 인사를 건넸다. ‘일시적 적군’인 나를 보러 일부러 발걸음 해준 그가 고마웠다. 아마도 벤투 감독은 진료실에서의 내 모습을 첫 인상으로 갖게 되었을 것이고, 환자와 의사로서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심리적 간격을 좁히지 않았을까. 거기에 오스트리아 원정경기 때 내가 일하는 방식을 지켜보며 신뢰감을 갖게 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건강 관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가 본 벤투 감독을 한 마디로 설명하면, 프로세스를 중시하는 원칙주의자이다. 자기 자신부터 계획적, 원칙적으로 관리한다. 이를테면 1년치 자기 일정과 목표를 미리 세우고 그에 맞게 일주일, 한 달, 두 달 일정을 잡는다. 프로세스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웬만해서는 이를 바꾸지 않고 타협하지도 않는다. 의료진 입장에서 봤을 때 벤투 감독은 소통하기가 쉬운 타입이다.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근거와 데이터를 놓고 대화하면 잘 통한다.
선수단을 선발할 때도 1차적으로 큰 풀(Pool)을 선정하고 2차, 3차를 거치면서 점차 좁혀 나간다. KFA의 전력분석위원, 전력강화실과 논의하고 선수들이 뛰는 경기를 직접 찾아가 보면서 4차로 좁히고, 파주NFC에서 소집훈련을 할 때 살펴서 경기에 뛸 최종 명단을 결정한다. 한국 축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분명하다고 보고, 이를 KFA와 공유하면서 그에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선수들을 선발한다.
경기의 승패와 아울러 자신의 계획이 경기 중에 잘 구현되었는지도 중요시한다. 상대에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리드하는 경기를 하고 싶어하고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노력한다.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할 구체적인 방향을 완벽에 가깝게 준비한다. 이러한 점은 우리나라 축구계에 있는 많은 분들도 높게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냉정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차분한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섭다. 2021년 6월 우리나라에서 진행된 월드컵 2차 예선전 레바논과의 경기에서, 벤투 감독이 물병을 집어던지며 화를 낸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선제골을 넣은 레바논 선수들이 작은 충돌에도 쓰러져 드러눕는 일이 잦아지자 경기 지연을 항의한 것이다. 그는 경기가 끝난 후에 있었던 공식 기자회견에서 “더 빠른 템포, 즐거운 축구를 하려면 (침대 축구에) 심판들이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최종 예선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면 이는 아시아 축구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다.”라고 꼬집었다. 축구의 발전방향을 고민하는 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은 벤투 감독이다. 미래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는 걸 선호하는 그의 성격상, 선수 한 명 한 명의 상황이 변칙적이고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걸 견디기는 쉽지 않다. 코로나 방역 때문에 선수들과 스태프들 사이의 루틴, 즉 일상적으로 돌아가는 패턴과 규칙이 뒤흔들리는 상황에 몹시 괴로울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전반적으로 담담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오스트리아에서 감염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선수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나에게 별도로 연락하거나 따로 만나서 “확진된 선수들은 어때요?” “선수들이 심리적으로 안정된 것 같아요?” 등등을 물었다.
“우리가 경기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와, 선수들의 안전을 잘 챙겨 주는 게 팀닥터의 역할입니다. 나머지 책임, 경기와 관련된 책임은 내가 집니다.”
그는 모든 경기에서 코로나 방역수칙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오스트리아에서 감염사태가 발생한 후엔 세부적인 일정에 대해 반드시 팀닥터와 협의를 하는 걸로 바꾸었다. 벤투 감독은 상대를 전문가로서 존중해 주는 만큼 그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한다. 철저한 방역을 위해서는 반가운 일이다. 덕분에 팀닥터들이 해야 할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긴 했지만.
벤투 감독이 여러 차례의 돌발상황에서도 방역을 최우선으로 두면서 동요하지 않은 이유는 ‘코로나 방역 중 경기 경험’이라는 KFA의 목표를 잘 이해했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선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두 번째, 마지막으로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를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터지고 나서 대표팀 팀닥터로서 코로나 방역에 관련된 KFA 주관 회의에 참여했고, 파주NFC에 방문해서 스태프와 직원들을 상대로 코로나 방역 교육을 진행했다. 교육 과정에 벤투 감독과 코칭 스태프도 함께했다.
난 교육자료를 만드는 걸 퍽 좋아한다.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질병을 무찌를 수 있으므로 좋은 교육자료를 만드는 데 기꺼이 시간을 투자한다. 그런데 코로나 교육자료를 준비하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어와 영어로만 준비하면 벤투 감독과 포르투갈 코칭 스태프가 어려워하지 않을까?’
이들은 평소 영어를 사용해서 한국 스태프와 소통한다. 영어 구사가 가능하고 통역 스태프도 있었지만 그들의 모국어인 포르투갈어로 아예 PPT를 만들면 훨씬 편할 듯싶었다. 말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똑같은 내용이라도 사람을 거쳐가면서 바뀌기 쉽다. 100건의 이야깃거리를 준비해도 통역사를 거치면서 90, 80으로 줄 수도 있다. 방역을 잘 하려면 감독과 코칭 스태프가 방역수칙을 100%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데, 혹여라도 내용이 전달되지 않으면 어쩌나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포르투갈어가 포함된 교육PPT를 만들어서 사용했다. 포르투갈어를 전혀 모르지만 구글 번역기가 있으니 걱정할 게 없었다.
오스트리아 원정경기에서도 벤투 감독의 요청으로 방역 교육을 이어갔다. 아무리 사전에 교육했어도 현지에서 달라진 상황에 맞게 수정 및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뚝딱뚝딱 PPT를 만들고, 이전처럼 룰루랄라 번역기를 돌려서 한국어, 포르투갈어의 2개국어를 포함한 내용으로 완성했다.
포부도 당당하게 교육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감독과 포르투갈 코칭 스태프 사이에서 갑작스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응?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이강인 선수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스페인에서 뛰고 있어서 포르투갈어를 알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이강인 선수의 도움으로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만든 PPT에 포르투갈어로 ‘포디도(Fodido)’라는 욕이 버젓이 쓰여 있었던 것이다. 영어로 치면 “Fuck”, 우리 말로는 “개xx” “씨x”에 해당한단다. 포르투갈어를 한 글자도 모르고 구글 번역기에 의지한 결과로 벌어진 참사였다. 오 마이 갓!
‘헐~ 의사라는 놈이 강의하면서 어떻게 저런 욕을 써놨냐?’
감독과 스태프들, 선수들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흑, 그냥 영어로만 할 걸…. 고개를 들기에도 민망했다. 어찌저찌하며 간신히 교육을 마친 다음 자료를 정리해서 후다닥 도망쳤다.
나중에 벤투 감독이 찾아와서 말해 주었다. 파주에서 교육할 때부터 포르투갈어를 넣어주어 고마웠다고, 포르투갈어가 들어간 PPT 덕분에 정말 재미있고 즐거웠다고.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었는데 감독의 진심이 느껴져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마 감독의 눈에 나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데도 죽자고 노력하는 ‘오지라퍼’이지 않을까. 그런데도 신뢰를 보여주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크다.
감독으로서의 그의 능력을 평가할 재주는 내게 없다. 다만 그가 대표팀의 수장으로서 보여주는 모습은 리더의 모범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떤 결과가 나오던지 자신에게 최종 책임이 있다는 자세를 유지한다. 원칙과 계획성을 강조하는 그의 특징에 대해 세간의 평가가 엇갈린다는 걸 알지만, 의사로서 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나도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나름의 프로세스를 만들어가고 있다. 프로세스를 만드는 사람은 누군가 그것을 깨려 하는 게 싫고 불편하다.
그는 감독으로서의 철학과 소신을 지켜나가면서, 방역으로 인해 기존의 루틴이나 프로세스가 깨어지는 것에는 옹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변칙적인 상황을 만나면 그에 맞게 대응해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우리 대표팀과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갈지 궁금하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모국인 포르투갈과 한조가 되는 다소 어색한 상황이 발생했지만, 그가 한국에 와서 계획한 것들과 KFA가 희망하는, 그리고 온 국민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게 되길, 모두 다함께 환호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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