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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로드 투 카타르>

03.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

by BOOKCAST 2022.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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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 쌤, 방호복 소매 끝에 있는 고리를 엄지손가락에 걸어주셔야 해요.”
“아 그렇군요. 이게 참 익숙하지가 않아서….”

신동일 조리사는 내 말대로 소매 끝의 고리를 잡아서 엄지손가락에 끼웠다. 그의 얼굴에 벌써 땀이 하나둘씩 맺혔다. 그는 나와 함께 방호복과 보호장구를 착용하는 순서를 하나하나 사진 찍는 중이었다. 내가 단계별로 방법을 설명하면 그에 맞춰서 신동일 조리사가 실행해 주고 나는 그 모습을 찍었다. 오스트리아 원정 때 귀국을 앞두고 선수들과 스태프들에게 방호복과 보호장구를 착용하는 방법을 설명해야 하는데, 이 방법이 제법 복잡해서 말보다는 사진을 찍기로 한 것이다.

신동일 조리사는 내 부탁을 받고 기꺼이 이 과정에 참여해 주었다.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면서 속장갑을 끼고, 방호복을 입고, 지퍼를 올린 다음 소매 고리를 엄지손가락에 끼우고, N95마스크를 착용하고, 고글을 착용하고, 후드를 쓰고, 겉장갑을 쓰는 것까지 모두 실행해 주었다.

신동일 조리사는 KFA 소속으로 10년 넘게 일했는데, 오스트리아 원정경기와 한일전 경기 모두 동행한 분이다(나와 함께 신문 기사에 실린, 오스트리아 원정 때 확진자들을 위해 현지에 끝까지 남겠다고 자원한 바로 그 분이다). 파주NFC에는 한 명의 조리장과 신동일 조리사를 포함해 세 명의 조리사가 있다. 모두 오래 일한 분들이라 선수들의 입맛과 기호를 잘 맞춘다.

영양사와 조리사는 맛과 영양 균형을 고려해 함께 식단을 짠다. 감독은 큰 틀에서의 의견을 제시한 다음, 완성된 식단을 검토해서 승인한다. 선수들의 취향에 감독의 주문을 고려하고, 원정경기의 경우 현지의 기후와 식재료까지 감안한다. 예를 들어 더운 지방으로 가면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고 설사를 유발할 수 있는 식재료를 피한다. 고산지대라면 철분과 비타민, 미네랄이 풍부한 식재료를 사용한다.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일 때 그에 맞게 전해질 보충 식단을 준비한다.

주식은 밥, 빵, 면에 야채와 과일 등이 고루 곁들인다. 뷔페 형태로 밥, 국, 반찬, 샐러드, 과일 등 모두 준비한다. 코로나 팬데믹 후부터는 선수들이 식당 입구에서 손소독하고 비닐장갑을 착용하고 입장하면 보호장구를 착용한 영양사와 조리사가 밥, 국, 메인 반찬을 담아주었다.

식사 외에도 훈련 스케줄에 맞춰 간식을 준비해서 선수들의 체력을 보충한다. 스프린트가 많은 날에는 탄수화물의 섭취 비율을 높인다. 탄수화물이 우리 몸의 제1에너지원인 만큼 식단의 메인을 차지한다. 특히 경기를 앞두면 고탄수화물 섭취가 중요하고, 경기를 마친 후에도 소진된 탄수화물을 보충하기 위해 고탄수화물 식사를 준비한다. 경기 직전에는 수분 유지를 위해 커피 등을 삼가고, 경기 전과 경기 중일 때 틈틈이 수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한다.

음식 관리에서도 감독마다 개성이 발휘된다. 벤투 감독은 과학적인 식단 관리를 선호한다. 그런 만큼 페드로 피지컬 코치와 조리장이 지속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선수의 신체능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영양을 충분히 고려한 식단을 운영한다는 대전제하에 벤투 감독은 돼지고기를 권하지 않는다. 돼지고기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돼지고기 부위나 돼지고기를 조리하는 방법으로 인해 선수들의 체지방이 증가되고 근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벤투 감독은 과도한 지방 섭취를 경계하여 소고기, 닭고기를 더 권장한다. 술은 아예 금지 대상이다. 선수들 중에 체력이 좋아서인지 술을 잘 먹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몸 관리 차원에서 조절한다. 특히 경기를 앞두면 자발적인 금주에 들어간다.

김학범 감독의 경우 흡연과 음주 금지는 동일하고, 음식 중에 특별히 금지하는 건 없다. 단, 삼시 세끼의 원칙엔 철저하다. 선수들뿐 아니라 스태프까지 절대 밥을 걸러서는 안 된다.

파주NFC 식단에서 선수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뭘까? 넘버원이 없다. 최애 음식을 딱히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다 잘 먹으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한식파가 절대다수이다. 손흥민 선수도 처음 독일 함부르크 유소년 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났을 때 쌀밥을 너무 먹고 싶어서 힘들었다고 할 만큼 한식을 사랑한다. 선수들은 식사를 마치면 “형, 오늘 너무 맛있었어요!”라며 조리장에게 인사를 건넨다. 주방 직원들은 파주에 오래 근무해서 선수들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하다.

선수단이 원정경기를 갈 때는 식재료를 준비해서 간다. 현지에서 구하기도 하지만 선수들의 건강과 입맛을 고려해서 대부분의 식재료를 한국에서 미리 준비한다. 그래서 식재료의 짐이 굉장히 많다. 이걸 준비하고, 관리하고, 음식으로 만들기까지의 과정 모두를 조리사가 담당한다. 밥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면 협회 조리사분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원 스태프들 다 그랬지만 신동일 조리사도 오스트리아 원정 때 고생을 많이 했다.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현지 호텔 직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혼자서 주방에서 동분서주했다. 오스트리아가 락 다운이라 식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제한된 식재료로 영양을 따져가며 음식을 만드느라 애를 먹었다. 확진자들이 컨디션 저하로 입맛을 잃으면 개별적으로 문의하여 비빔밥이나 김밥 등 원하는 식사를 준비해 주기도 했다. 선수들 짐을 챙기고 운반하는 일까지 발 벗고 나서는 등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스케줄을 푸근한 아재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견뎌냈다. 명실공히 주방 안팎을 가리지 않고 날아다닌 슈퍼맨이었다.


그깟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걸다

최종 예선 6차전 카타르와의 경기를 앞둔 전날, 스태프들은 난상토론을 벌였다. 누군가가 의견을 내면 다른 이가 문제점을 지적하며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그런 식으로 토론이 계속 이어졌다. 다들 심각했고 진지했으며 때때로 팽팽하게 맞섰다. 어떤 안건 때문이었을까.

안건은 ‘선수들의 짐을 언제 쌀 것인가’였다. ‘에게, 고작 이런 걸로?’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사소해 보이는 주제는 언제나 중요한 안건이다. 스태프들은 선수들의 일정을 치밀하게 짠다. 선수들은 경기를 마치면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겨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떠나게 된다. 여유 없이 빠듯한 일정으로 진행되는 이유는 선수들이 소속팀 일정에 맞게 무사히 복귀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 한두 시간의 차질만 생겨도 일정이 어그러진다. 때문에 선수들은 짐을 챙기는 일정이 빠듯하다고 느끼면 신경을 쓰게 되고 그러면 경기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아무리 사소해도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스태프들은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정몽규 회장은 경기 후 짐을 챙겨 공항에 가는 방식은 집중력을 떨어뜨려 경기에 방해가 되므로,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할 정도이다.

그날 일정은 저녁 6시에 경기 시작, 8시에 종료, 도핑까지 포함해 모든 일정이 10시에 끝날 예정이었다. 선수단 비행기는 다음날 새벽 2시에 출발하고, 해외로 가는 선수들도 비슷한 시간대였다.

선수들에게 가장 편한 스케줄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걸 고민했다. 경기장에 가기 전에 짐을 다 싸서 경기장에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짐을 싸고 경기장에 갔다가 끝나고 돌아와서 식사하고 짐을 챙겨서 공항에 갈 것인가. 아니면 짐을 챙기지 말고 경기가 끝난 후 돌아와서 식사하고 짐을 싸서 공항에 갈 것인가. 방안은 세 가지였다.

결정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요소들은 상당히 많다. 한 번 원정 갈 때마다 짐이 어마어마하다. 선수들 개별적인 짐이 있고 선수단 차원의 짐이 있고 스태프 짐이 있는데, 개수로만 보면 100개가 넘는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공항에 갈 때까지 3시간밖에 없다는 점, 지금까지 우리가 짐을 쌀 때 걸린 시간, 카타르 축구협회에서 우리를 돕도록 파견된 포터들의 숙련도 등도 고려해야 할 요소다. 경영진의 의견, 선수들의 의견, 행정 스태프의 업무 효율성, 스케줄, 현지 환경, 현지 서포트 상황 등을 다 고려해야 한다. 이런 점들을 감안했을 때 경기 후 돌아와 짐을 싸는 건 시간이 부족하다는 결론이었다. 세 번째 옵션은 탈락되고, 이제 남은 건 두 가지였다.

미리 짐을 싼 다음 오후 1시에 일괄적으로 다 내릴 것인가, 아니면 짐을 싸고 경기장에 갔다가 끝나고 돌아와서 식사하고 짐을 챙겨서 공항에 갈 것인가, 를 가지고 다시 토론이 벌어졌다. 정태남 팀장은 첫 번째 안을 지지했는데, 문채현 차장은 두 안의 장점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안을 내놓았다. 문 차장의 의견은 이랬다.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이 씻어야 하고 짐을 좀 더 잘 정리할 수 있는 시간적 · 마음적 여유가 있다. 그러니 선수단 짐은 먼저 싸서 오후 1시에 내려놓고, 선수들 각각의 짐은 경기가 끝나고 챙기게 하자는 것이다. 수 시간에 걸친 토론 끝에 문 차장의 의견이 최종 수용되었다. 탑차에 선수단 짐, 스태프 짐이 먼저 실리고 마지막에 선수들의 짐을 실었다.

선수들의 짐을 언제 챙길까 하는 이슈는 상충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선수들의 심리 안정을 위해선 여유롭게 짐을 챙기는 게 좋지만, 소속팀 일정을 생각하면 빠른 복귀가 중요하다. 스태프들은 매번 이런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가장 최선의 결정을 하려고 노력한다. 모르는 이들은 “아니, 그냥 짐을 내리면 되잖아.”라고 하겠지만 수년간이 일만 해온 실무자들, 그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 20명 넘게 모여서 단순한 이슈 하나를 놓고 심각하게 의견을 나눈다. 비행기표 예약이라는 단순한 일에도 여러 가지 고민한다. 최종 예선 4차 이란 원정 때 전세기를 타고 가기로 했는데, 카타르 항공을 선택할지 두바이 항공을 선택할지 고민했다. 시간과 돈뿐 아니라 어떤 게 우리 목적에 더 부합하는지, 우리 선수들이 편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많은 경우의 수를 놓치지 않고 따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최고의 경기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국가대표 팀닥터로 일하면서 처음에 미처 몰랐단 점들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그렇다. 스태프들과 토론을 거듭할수록 왜 이들이 여러 가지 많은 논의와 고민, 시행착오를 거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들이 다루는 숱한 이슈들을 외부로 다 공개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기에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조직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한때는 나도 그랬다. 선수들의 경기력을 위해 스태프들이 어디까지 신경을 쓰고 세심하게 배려해야 하는지 몰랐기에 이해하지 못하고 오지랖을 떨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밖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은 이면이 많으며, 그렇기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기장만 본다. 하지만 그 뒤쪽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이들이 선수들을 위해 뛰고 있다. 장비를 챙기고, 스케줄을 점검하고, 선수들의 경기력을 분석하고, 언론을 상대하고, 식사와 간식을 준비한다. 경기장 잔디를 관리하는 사람, 관객석을 순찰하면서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고 90분 내내 경기장을 등지고 앉아 있는 보안요원들까지, 경기장 안팎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이 ‘축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은 발로 뛰지만, 이들은 마음으로 함께 뛴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지 않아도 밀알처럼 기꺼이 거름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경기 중간에 이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고 한 사람씩 이름이 불리는 순간이 있다면 어떨까. 선수, 관객, 스태프가 서로 눈을 맞추고 뜨거운 환호와 따뜻한 위로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 거다. 물론 나의 판타지일 뿐이다.

어찌 축구뿐일까. 개개인의 희로애락에 앞서 공동체를 최우선시 하는 사람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좋아하니까 열심히 하는 사람들 덕분에 사회가 유지된다. 우리 사회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이들을 응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대 뒤쪽을 바라봐 줄 수 있는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 오늘도 이들 덕분에 세상은 굴러가고, 우리는 평온한 하루하루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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