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다섯 살 외벌이 가장, 공공기관을 떠나다
재직기간이 2년 반을 넘어가자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내가 맡았던 일이 여러 가지 이유로 조직에서 전혀 원하지 않았던 쪽으로 바뀌는 상황이 기폭제가 되었지만, 실은 내 속의 ‘그것’이 또 움직인 탓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일상화되고 틀이 고정되는 삶, 아주 쉽게 미래의 모습이 그려지고 늘 같은 공간을 다니며 같은 업무를 반복한다는 것이 점점 숨통을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조직을 떠날 용기도, 그렇다고 원하는 방향으로 개선할 용기도 없을 때면 먼저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택한다. 나 또한 일에서도 관계에서도 조금씩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내에게는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계속 이곳에 버티고 있는 건 내게도, 이 조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선택일 것 같아.” 진심을 담아 한 말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양심 없다’ 싶기도 하다. 어린 두 아이를 둔 전업주부 아내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그때 내게 이어진 끈이 몇몇의 민간 전직전문기업들이었다. 문제는 그곳들로 옮겨간다 해도, 급여 수준은 이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더구나 그 회사들 대부분이 서울 강남 쪽에 몰려 있어 출퇴근 시에는 전철을 이용해도 편도로만 3번을 갈아타고 2시간을 가야 했으니, 매일 왕복 4시간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또 나는 4인 가족의 외벌이 가장이었다. 공공기관을 떠나는 순간 기약 없는 불안정의 상태로 접어들 텐데,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을 선택한다는 부담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오랜 꿈이긴 했지만 1인기업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으로 가족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자책감이 계속해서 나를 짓눌렀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했으면 임상심리전문가인 지인에게 상담을 청하기까지 했을까. 게다가 기존에 참여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중도에 이탈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그 역시 마음에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공공기관을 떠나면 안 되는 이유는 책을 한 권쯤 쓰고도 남을 것 같았다. 반대로 옮겨도 되는 이유는 아마 막연하기 그지없는 꿈과, 당시 상태로는 더 이상 내가 조직에, 조직이 내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전부였다. 다만 당시에 나는 점점 소진되어갔고 전환의 계기가 필요했다.
그만두지 말아야 할 이유가 훨씬 많음에도 결국 사표를 내기로 결심하고 상사에게 이야기했다. 지금도 기억 속에 퇴직 의사를 알린 날의 내 모습이 생생하다. 그날 내 속에는 두 가지 목소리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사표를 물러. 확신도 없는 수렁 속으로 가족을 몰아가고 있잖아. 네 삶이 너 혼자만 사는 거냐?’라는 목소리와 ‘이제 결정했고 끝났어. 되돌릴 수 없어. 지금 돌아가서 사표 무르자는 건 너무 웃기는 거 아냐?’라는 속마음이었다. 회사 앞 승강장에서 아마도 한 30분은 서성이며 고민했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장미여관이란 그룹이 불렀던 노래 중에 <퇴근하겠습니다>라는 노래가 있다. 그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무책임한 남자, 나는 바보 같은 남자, 나 혼자 행복하게 살겠다고 그만둔다 말했네.” 지금도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안절부절못하던 내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내년에는 무서워서 못 나갈 것 같습니다.”
공공기관을 그만두며 숱한 우여곡절을 거치고 나서야 2013년 6월 새로운 시작을 했다. 그때 내가 들어간 회사는 한국에 몇 안 되는 민간 전직전문기업 중 하나였다. 들어가자마자 대기업 퇴직자들에 대한 전직지원 사업(퇴직자들의 재취업과 새로운 진로설계를 돕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고, 성과향상 교육 등 다양한 사업을 경험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런 새로운 영역들을 좋아했다. 당시엔 미처 인지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그 과정을 1인기업으로 가는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공공 서비스와 민간 서비스의 질이 극명히 갈라지는 지점은 결국 ‘비용’이다. 공공기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서비스 이용료를 따로 지불하지 않는다. 그러니 불평은 할 수 있지만 서비스 자체에 대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반면에 민간 서비스는 ‘돈을 줬는데 겨우 이 정도냐’고 당당히 따질 수 있다. 그렇기에 당연히 민간 서비스 이용자들의 요구는 까다로워지고, 서비스 제공자는 온갖 다양한 상황들에 노출된다. 엉뚱한 이유로 강사의 자존감쯤은 우습게 보는 심한 경우도 더러 봤다. 무엇보다 돈을 내고 이용했으니 결과가 나쁘다는 판단이 들면 다음 기회 자체를 주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하든 이용자의 요구수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보낸 1년은 좋은 트레이닝의 시간이 되었다. 때로는 조금 힘들었어도 업무 자체에 대해서는 내가 원한 것들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니 또 내 속의 ‘그것’이 들고 일어났다. 이제 40대 중반을 넘어가는데 도대체 언제쯤 내가 원하는 1인기업을 할 수 있냐는 깊은 갈증이 나를 괴롭혔다. 그 최종의 목표가 없었다면 굳이 안정된 공공기관까지 박차고 나올 이유는 없었다. 거기다 왕복 4시간의 출퇴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사당역 지하철에서 환승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흘러가며’ 하루를 이렇게 기운을 빼며 시작하는 건 미친 짓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아예 새벽 5시 50분경의 첫차로 인천에서 출근하기도 했다. 새벽에 나가 저녁 늦게 귀가하는 날이 반복되었고, 가족들은 집에서 잠시 얼굴만 보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고민을 하다 결국 결심을 굳히고 회사 측에 독립의사를 밝혔다. 핵심은 독립하고 AC(Associate Consultant, 정기적 급여는 없지만 일이 생길 때 우선적으로 일을 맡기는 외부전문가)로 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회사는 ‘내년이면 무서워서 나간다는 말을 못 할 것 같다’는 반쯤 농담 같은 내 표현을 흔쾌히 수긍해주었다. 나의 1인기업은 그렇게 시작을 열 수 있었다.
1인기업의 첫발을 어렵게 내디딜 수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우려와 달리 스스로에게 잘한 결정이었다. 다니던 공공기관에 계속 그 상태로 머물렀다면 모두에게 냉소적이고 비틀어진 모습으로 기억되었을 것 같고, 내 속에는 그때 무언가 도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늘 후회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건 나를 많이 성장시켜준 조직에 대한 예의도, 내적 갈등으로 숱한 고민의 밤을 새웠던 나를 위한 선택도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안 되는 이유 백 가지보다, 되는 이유 한 가지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논리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때로 무모함에 표를 던질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결국 자신이 절실한 만큼만 나아갈 수 있다. 때로 무모함에 표를 던질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결국 자신이 절실한 만큼만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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