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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맛있는 맥주 인문학>

03. 바이에른의 맥주 순수령?

by BOOKCAST 2020.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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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와 법령


수입 맥주가 범람하면서 우리가 마시는 맥주는 참 다양해졌다. 그 다양함 속에는 여러 재료가 숨어 있다. 맥주를 마실 때, 한번쯤 라벨을 살펴보자. 맥주에 들어가는 원료는 매우 다양하다. 효모・호프・맥아・밀・설탕・옥수수・사탕수수(재료를 나열하지 않고 전분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등이다. 재료가 다양한 만큼 와인 못지않게 맥주도 맛이 다양하다.

그 다양함에 대한 욕구는 과거에도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았었던 것 같다. 맥주에 관한 자료들을 찾다 보면 ‘순수령(Reinheitsgebot)’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맥주 회사에서는 맥주를 소개할 때 ‘OO 맥주는 맥주 순수령을 지켜 만들었다’ 같은 이야기를 한다. 순수령은 맥주 원료를 제한하고 명시한 제도다.

 

 

 

 

알브레히트 4세(왼쪽)는 순수령을 반포했고, 그의 아들 빌헬름 4세(오른쪽)는 순수령을 바이에른 전역으로 확대했다.

순수령을 처음 만든 것은 1487년 11월 30일 바이에른-뮌헨 공국의 통치자였던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4세(Albrecht IV)다. 현명공(賢明公)이라고 불리는 알브레히트 4세는 원래 수도사가 되려고 했으나, 큰형인 요한 4세가 죽자 수도사의 길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동생인 크리스토프와 볼프강은 상속을 포기했고, 둘째 형인 지그문트는 뮌헨을 양보하고 다하우(Dachau)의 공작이 되었다. 1501년 지그문트가 사망하자 알브레히트 4세는 그가 다스리던 지역을 통합해 지배 영역을 넓혔다. 빌헬름 4세(Wilhelm IV)가 만든 순수령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알브레히트 4세의 바이에른 통합 정책 덕분이다.

도시가 발달하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맥주 소비도 늘어난다. 그래서 맥주 전문 양조업자가 생기기 시작했고 일부 수도원에서는 밀 맥아로 맥주를 만들어 큰 수익을 내기도 했다. 그들은 기존의 그루이트와 달리 홉을 넣은 맥주를 만들어 팔았다. 홉을 넣자 쌉쌀한 맛과 상쾌한 향기가 더해졌다. 그러나 여러 가지가 혼합되다 보니 전체적인 질이 나빠지기도 했다.

이러한 부작용 때문에 바이에른에서는 1100년대부터 맥주제조와 관련된 다양한 법령이 만들어졌다. 1156년 6월 21일에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품질이 나쁜 맥주를 만들어 판매하면 벌금을 내게 하는 법령이 언급되었다. 1303년에 뉘른베르크(Nürnberg)에서는 보리 외의 곡물로는 맥주를 만들지 못하게 하면서 최소한 8일을 발효한 맥주를 팔게 했다. 제대로 발효되지 않은 맥주를 파는 행위를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1348년에 바이마르(Weimar)에서 제정한 법령에는 맥아와 홉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넣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당시의 라인강 지역 일부 도시에서는 맥주에 홉을 넣는 것을 금지했다. 그루이트의 독점권을 갖고 있던 쾰른(Köln) 대주교가 맥주 제조법에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1469년에는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시의회에서도 보리 맥아·홉·물만 사용해서 맥주를 빚도록 성분을 제한했다. 1493년에는 바이에른 란츠후트(Landshut)에서도 맥아·홉·물만을 사용하도록 하면서 소나무 껍질과 열매 등을 맥주에 넣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맥주에 관한 여러 법령과 규제가 있었을 정도로, 당시 맥주가 많이 만들어졌고 마시는 사람도 많았다. 사용하는 재료도 다양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통제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정리하고자 알브레히트 4세는 맥주 순수령을 제정하고, 뮌헨 지역의 모든 양조업자가 따르게 했다. 이렇게 해서 1487년 11월 30일, 뮌헨의 순수령이 만들어졌다.

 

 

 

 

1516년 바이에른에 공포된 순수령. 순수령의 골자는 맥주의 재료를 맥아·홉·물(이 후에 효모 추가)로만 한정하는 것이다.

알브레히트 4세는 1501년에 다하우를 시작으로 바이에른 지역을 통합하기 시작했고, 영토 분할을 막기 위해 장자상속 원칙을 세웠다. 덕분에 빌헬름 4세는 통합된 바이에른을 다스릴 수 있었다. 알브레히트 4세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이어받은 빌헬름 4세는 1516년 4월 23일 잉골슈타트(Ingolstadt)에서 열린 주의회에서 맥주 양조에 관한 법령을 바이에른 전 지역에서 따르도록 공포했다. 당시 법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절기(9~4월)에는 리터당 1페니, 하절기(4~9월)에는 리터당 2페니로 맥주값을 고정한다. 양조업자들이 호밀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해서 호밀의 가격을 안정시켜 빵값을 적절하게 유지한다. 맥주는 보리 맥아와 홉, 물로만 제조한다(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한 양곡관리법으로 술을 만들 때 쌀을 사용하지 못했던 과거가 있다).

효모의 작용을 몰랐던 시대다 보니, 효모에 대한 언급은 없다. 효모는 1551년 개정될 때 포함되었다. 이 규정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라인하이츠게보트(Reinheitsgebot)’라는 용어는 1918년에 바이에른 주의회 토론에서 사용된 단어고, 처음에는 명령, 법률을 가리키는 ‘Gebot’ 대신 좀 더 금지 의미가 명확한 ‘Verbot’를 사용했다. 맥주 순수령이 공포되기 전 독일 남부 지역에 적용된 맥주 양조법이 있었는데, 몰트의 독일식 표현인 ‘Malz’를 사용했다. ‘보리’라고 하지 않고 ‘맥아’라고 한 것을 보아, 보리 외에도 다양한 곡식을 이용해 맥주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맥주는 원래는 보리로 만든 맥아 이외에도 밀·쌀·귀리·수수 등으로도 빚었다. 맥주의 가격과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보리·홉·물 외에는 다른 재료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조항과, 호밀을 제빵업자들만 사용하게 한 조항을 들여다보면 맥주 순수령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당시 유럽에 도시가 발달하면서 술, 특히 맥주 소비가 급증했다. 자연히 주조업자가 몰려들었다. 그래서 적절한 조세를 받을 수 있도록 맥주 가격을 고정했다.

밀의 일부가 맥주를 만드는 데 사용되다 보니 식량으로 사용되어야 할 밀의 양이 줄어들어 빵값이 올랐고, 사람들의 원성이 끊이질 않았다. 빵값을 안정시키려면 원료인 호밀과 밀의 가격을 안정시켜야 했고, 곡식이 사용되는 곳을 줄여야 했다.

또한 술의 맛과 보존을 위해 당시 양조업자들은 다양한 허브와 약초로 만든 그루이트를 사용했다. 그런데 가격을 낮추려고 저렴한 재료들을 넣었다. 주조업자들은 그을음이나 광대버섯을 넣기도 했고, 빨리 취하라고 독초도 넣기도 했다. 맥주 맛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잘못 먹어서 탈이 나는 사람도 생겼다. 이러한 사고와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고자 향과 방부효과가 뛰어난 홉을 사용하게 한 것이다.

홉은 깊은 맛과 향을 내는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방부제 역할이다. 홉을 이용한 보존법이 알려지면서 다른 검증되지 않은 방법들은 금지되었다. 또한 그루이트의 사용을 제한하고 홉만 사용하게 함으로써 교회와 중소 영주들의 독점권을 무력화했다. 여기에는 조세를 독점해 통치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

독일 북부 지역은 한자동맹 등 상업 동맹으로 영주나 왕의 명령보다는 금전적 이익을 중시해왔지만, 남부 지역에서는 영주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빌헬름 4세의 순수령은 바이에른 지역의 맥주 양조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물론, 감시의 눈을 피해 밀을 첨가한 맥주도 여전히 만들어졌다.

순수령에는 함부로 맥주를 만드는 주조업자에 대한 처벌도 명시되어 있다. 언급한 재료 외에 다른 재료를 사용하면 맥주를 담는 통을 압수당했다. 그러면 양조업자는 맥주를 유통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규정이 있었다는 것은, 술을 빚을 때 다양한 곡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맛있는 맥주를 만들려면 보리만 넣는 것보다는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서 각 재료의 장점이 부각되는 것이 좋다. 벨기에처럼 쌀이나 귀리·밀·옥수수·과일 등 다양한 재료를 넣으면 다양하고 맛있는 맥주를 만들 수 있다. 맥주를 만들 때 순수령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덕분에 벨기에는 ‘맥주 백화점’이라고 할 정도로 맥주가 다양하다.

맥주 순수령은 정치·경제적 이해가 깔린 제도였으나, 한정된 재료로 맛을 내다보니 자연히 맥주를 빚는 기술이 발달했고 품질이 향상되었다.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했을 때 두 번째로 큰 세력이었던 바이에른 공국은 제국에 합류하는 조건으로 맥주 순수령을 독일의 전체에 확대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다른 지역의 반발이 심했으나 받아들여졌고, 1906년부터 독일 전역에서 순수령이 시행되었다. 순수령 조건에 맞추어 맥주를 빚어왔던 바이에른의 주조업자들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으나, 다른 지역의 양조업자들은 새 기준에 맞추어 맥주를 빚어야 했기 때문에 맥주 맛을 안정시키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 시기에 바이에른의 맥주가 독일 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치하에서도 맥주 순수령은 유지되었지만 유럽연합 결성과 유럽 시장 통합 과정에서 프랑스 맥주 회사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지금은 공식적으로는 순수령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독일 양조업자들은 지금도 암묵적으로 이 법에 근거해서 맥주를 제조하고 있다.

맥주 순수령을 지킨 맥주가 독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산 맥주 중에도 맥주 순수령을 지켜서 보리로만 만든 맥주가 있다. 하이트진로의 맥스, 오비맥주 프리미어가 대표적이다. 다만 이런 맥주는 맥주 전체 비중에서 맥아의 비율이 낮은 게 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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