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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나의 마지막 영어공부>

03. ‘언어덕후’는 아니지만 덕질 영어!

by BOOKCAST 202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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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외국어는 영어와 결이 많이 다릅니다. 프랑스어,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는 대부분 성인이 되어서 처음 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어와 달리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언어이다 보니 성인이 되어서 아예 기초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기초적인 문법과 단어부터 생소하니 훨씬 더 그 과정이 고되고 버겁죠. 대신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대한 애착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실제로 스페인어과 학생들이 라틴댄스를 배우거, 프랑스어과 학생들이 상승을 배우는 건 흔한 일입니다. 새로운 문화를 사랑하고 배우려고 노력하는 그들을 보면서 부러워했던 기억이 나요.
 
영어를 공부한다고 해서 다른 영어권 국가에 대해 애착이 생기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를테면 영어를 배운다고 새로운 ‘identity’가 생기지는 않아요. 오늘날의 영어는 그냥 전 세계인 이 사용하는 글로벌 언어에 가깝습니다. 그 대신 영어는 누구에 게나 익숙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공교육을 통해 이미 알파벳은 뗐고, 파닉스에 익숙하고, 간단한 인사말도 가능하고, 어느 정도 수준의 독해력도 갖추고 있고, 영문법도 아예 모르지는 않잖아요? 이처럼 영어는 20살 이전부터 자주 접하고 공부했다는 장점이 있어요. 그래서 성인이 되고 나서 ‘영어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다져놓은 땅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이왕이면 좋은 위치에, 튼튼하게 다져놓은 땅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만큼 다른 언어에 비해 시간과 수고를 덜 들여도 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는 그 나라 문화도 함께 공부하게 되고, 그러한 문화를 내 자신의 정체성처럼 받아들이게 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영어는 그런 면에서 매력은 좀 떨어지지만 대신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파고들 수 있게 해주는 튼튼하고 쓸모 있는 도구입니다. 쉽게 말해 영어는 ‘덕질’에 최적화된 언어입니다.
 
2015년 봄, 저는 첫째를 임신해 만삭인 상태였어요. 스스로 ‘난 좀 역마살이 있어.’라고 생각할 정도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는데 집에만 있으려니 영 답답하고 지루하더라고요. 대신에 스마트폰을 잡고 하루 종일 이것저것 검색하며 궁금증을 풀었죠. 저처럼 세상만사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주로 찾아보는 곳이 있어요. 한국에서는 나무위키, 영어권에서는 구글과 위키피디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무언가를 검색하다가 터키 TV 드라마 〈위대한 세기〉를 접하면서 소소한 즐거움을 얻었어요. 옷을 좋아하는 저는 영상물을 볼 때 내용과 연기보다는 예쁜 의상이 많이 나오는 'costume drama(의상이나 소품으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사극 등의 드라마)’를 더 선호하는데요. 〈위대한 세기〉가 딱 그런 드라마였습니다. 이 드라마는 16세기 오스만 제국을 배경으로 제국을 다스린 제10대 술탄 술레이만 1세와 황후 휘렘 술탄의 일생을 그린 작품입니다.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터키 배우 메리엠 우제를리의 화려한 미모와 그에 걸맞은 드레스들은 보는 것만으로 눈 호강이었어요. 저는 이 드라마를 통해 소소한 ‘덕질’을 시작합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이제와서 드라마에 빠져 터키어를 배우기란 무리였어요. 그래서 아쉬운 대로 구글에서 영어로 된 〈위대한 세기〉자료를 열심히 검색했습니다. 지금은 케이블 방송국에서 한국어 자막까지 친절하게 달아 방영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제가 본 〈위대한 세기〉는 영문 자막이 달린 버전이었습니다. 이것도 아마 드라마의 팬이 자발적으로 번역해서 자막을 단 게 아닐까 싶어요. 분명 영어로 된 자막인데 읽으면서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그렇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나쁘지 않았어요. 드라마는 물론 그 시대 터키의 문화와 풍습, 복식 등을 찾아보고 공부하며 그해 봄의 몇 달을 보냈습니다. 역시 영어는 덕질을 할 때 아주 유용하더라고요.
 
요즘 저는 SNS를 통해 알게 된 터키, 인도의 10대 친구들과 자주 소통하곤 해요. BTS가 좋아서, 다른 한국 아이돌이 좋아서 한국 문화에 푹 빠진 어린 친구들이 대부분인데요. 제가 통역사인 걸 알고는 저를 ‘언니’라고 부르며 한국어 번역과 공부를 도와달라고 하거나, K팝과 관련된 모르는 표현을 설명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문화를 공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예쁘기도 하고, 나이가 한참 위인 제게 언니라고 하는 것도 귀여워서 열심히 설명해 주곤 합니다(이모라고 부르라고 할까 하다가 말았어요). 아예 한국어 교재를 또박또박 읽어서 녹음해서 보내준 적도 있어요. 한국어 교사가 아닌 제가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이들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유 역시 영어가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영어에 어려움이 있었다면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하는 소소한 기쁨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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