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
퇴사 6개월 뒤 불거진 카드 3사 고객 정보 유출 사건은 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카드 부정 사용 방지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에서 외주 개발자가 테스트 용도로 넘겨받은 카드사 고객 정보를 광고 대행업체에 팔아넘긴 사건이었다. 그 당시 나는 은행장 도전에 실패하고 정든 직장을 떠난 뒤였음
에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모 대기업 CEO로 내정되어 새 출발을 앞두고 있었건만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감독 당국이 내린 ‘해임 권고’는 중징계 중에서도 가장 높은 단계로 5년간 금융사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는 중벌이었다. 여기에 CEO 재임 당시의 중장기 성과급 수령 자격까지 박탈당했으니, 퇴사 이후 2~3년간의 좌절과 원망은 가혹한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평생 금융인으로 살아오면서 단 한 번의 징계는커녕 수많은 대내외 포상으로 자부심을 쌓아왔는데 퇴사 후 소급하여 징계를 받다니, 인생은 결승점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그 승패를 진정 알 수 없는 것인가. 평생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 같았는데 동시다발로 닥치는 악재는 그야말로 나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땅심 돋울 겨를도 없이 경작과 수확에만 매달려 있다가 문득 허리 펴고 둘러보니 빈 들판은 푸석푸석 메말라 있고 해거름에 덩그러니 나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치유의 시간이 필요했고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배낭을 벗 삼아 세계 도처를 유랑하는 나를 아내는 우스갯소리로 ‘총각님’으로 부르곤 했다. 가정보다 직장을 우선시하며 살아온 남편에 대해 원망이 실린 표현이리라.
특히 퇴직 무렵의 나는 무너진 자긍심과 상실감을 메우고자 지난 여정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또다시 습관처럼 항공권을 사고 배낭끈을 조이곤 했다. 그렇게 혼자서, 때론 아내와 함께한 여정은 촉촉한 단비가 되어 지쳐있던 삶에 여유와 윤기를 찾아 주었다. 땅심이 차올랐다.
번민
뉴델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의지한 채 상념에 잠겼던 순간도 벌써 6년이나 흘렀다. 혼자서 찾아 나서는 파미르고원에 대한 경외감은 출발 직전에 만났던 모 중소기업 대주주와의 약속과 뒤엉켜 머릿속을 무겁게 했다.
과연 회사를 잘 키우고 주주 이익을 잘 실현할 수 있을까? 선뜻 받아들인 조건이 옳은 판단일까? 주주의 경영 관여 우려도 전문 경영인에게는 내려놓기 힘든 화두다. 경영에 대한 간섭은 일절 없이 전권을 줄 것이니 회사를 잘 키워달라는 요지였다. 그 말에 나는 시장의 냉정한 평가에 따라 유능한 경영자로 남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려면 정도 경영은 기본이다. 이는 곧 주주의 부당한 경영 간섭을 정중히 사양하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말이다.
승무원이 권한 맥주 몇 잔이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 멈추게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취기가 사라지자 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망상으로 이어질까 봐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긴 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생소한 회사 이름은 물론이고 이전 직장과는 판이하게 다른 규모와 성격에 가족과 지인들도 의외라는 눈치였다. 금융그룹에서 큰 계열사를 이끌었던 중량급 경영자가 무명의 중소기업 경영을 맡기로 했다니 의아해할 만도 했다. 그러나 카드사 고객 정보 유출 사건으로 금융회사 취업 제한에 묶여있던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또 중소기업의 경영 환경이 어렵고 처우도 낮지만, 유능한 경영자로 재평가 받으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실추된 명예 회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자기합리화 내지는 오기가 발동했다.
사실 대기업에서의 경영 성과는 허상일 수도 있다. 시스템과 제도가 잘 갖추어진 기업 환경에서 우수한 참모진과 함께하는 경영은 CEO의 합리적 의사결정만으로도 잘 작동한다. 그러나 제도나 시스템이 미비하고 인적 자원마저 취약한 중소기업은 정공법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변칙 플레이까지 필요할 때가 있다. 함께 가기에 부적절한 임직원을 퇴출하는 외과적 응급수술은 기본이다. 특히 체계가 덜 잡힌 중소기업일수록 제도 정비를 통해 시스템적 운영을 추구하고 불합리한 업무 관행을 제거하는 변혁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맡게 될 기업 또한 그런 곳임을 취임 후 곧 알게 되었다.
여행자의 눈
뉴델리 공항을 나서자 인도 특유의 향을 머금은 후덥지근한 바람이 코끝을 할퀴고 지나갔다.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국내선으로 황금빛 사원의 도시 암리차르로 갈 예정이었다. 오래전에 읽었던 류시화의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은 인도에 대한 내 호기심에 불을 지핀 책이다.
저자는 내가 갈 이 길을 기차로 여행하며 만난 자이나교 노인과의 한담을 소개한다. 그 노인은 인간은 자연, 나아가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람으로부터는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강으로부터는 더 큰 세계로 나아감을, 기차로부터는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간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저자가 신발로부터는 무엇을 배워야 하느냐고 묻자 그는 “어떤 어리석은 자가 쓸데없는 것을 발명하면 그것이 얼마 안 가서 전 세계에 퍼져버린다는 걸 배울 수 있지”라고 답했다. 이어서 배낭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 묻자 그는 대뜸 “먹을 것이 들어 있으면 앞에 앉은 사람과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라고 했단다. 인도를 여행하다 보면 가끔 이런 인생의 구루를 만나게 되고, 철학과 궤변의 경계를 넘나드는 화술에 매료될 때가 있다.
인도와 인연을 맺은 사람은 한 번의 방문 끝에 두 번 다시 찾지 않거나 묘한 영적 이끌림으로 여러 번 반복해 찾는 부류로 나뉜다고 했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아내 또한 처음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을 향할 때 뭔가 깨달음을 얻을 것 같은 마음에 흥분했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큰 개들이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네 다리 쭉 벋은 채 자는 것을 보며 역시 인도는 개조차 영적인 자유를 누리는 곳이구나 생각했단다. 시간이 지나면서 허기진 개의 실상임을 알고 인도의 또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흙먼지 자욱한 거리에서 힘겹게 페달을 밟으며 가족을 건사하는 릭샤 왈라의 깊은 눈은 여행자의 영혼마저 빨아들일 듯이 애절하다. 곧이어 탁! 하고 뱉는 가래침 속의 붉은 선혈은 이미 깊어진 폐병으로 짓눌린 삶의 무게를 그대로 전해 온다. 이런 인도 특유의 분위기에 사로잡힌 나는 벌써 무굴과 힌두 문화의 핵심 지역을 두 번, 북인도 라다크, 남인도 등 총 네 번을 여행한 터였다.
코로나 팬데믹 직전, 첸나이에서 시작해 뭄바이에서 끝난 남인도 여정은 아내와 함께했다. 북인도의 델리와 바라나시에서는 소, 개, 돼지가 쓰레기통을 뒤지며 인간과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반면 인도 서남부는 일찍이 유럽과의 무역으로 성장해 온 덕인지 서구적 면모로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갈 때마다, 가는 곳마다 천의 얼굴로 다가오는 인도 여행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도 평면적이지 않으며 세상에 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번 여정은 파미르고원으로 가는 길에 잠시 스쳐가는 다섯 번째 인도 방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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