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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아부다비 외교 현장에서 일하고 배우다>

01. 왕정국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by BOOKCAST 2022.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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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왕을 국가의 수반으로 둔 왕정국가가 생각보다 많다. 영국, 일본, 태국, 스웨덴, 덴마크, 벨기에가 그러하며, 이들 왕정국가 간에는 왕실끼리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국왕은 국가의 통합을 상징하는 형식적인 위치에 머물고 실제 국정 운영은 국민이 뽑은 수상이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나라들을 입헌군주정이라고 한다면, 걸프 국가들은 국왕이 국가의 상징에 그치지 않고 직접 나라를 통치한다는 점에서 현대판 절대 군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군주정과는 전혀 다르지만 왕이 부와 권력을 가지고 국가를 통치한다는 점에서는 절대 군주정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걸프 왕정국가에서 외교나 비즈니스를 할 경우 이런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라비아반도에 있는 국가 중 예멘을 제외하고 6개의 GCC 국가들이 왕정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는 7개의 왕정 체제 토후국들이 연방제를 채택한 형태인데, 연방은 대통령제로 운영되지만, 연방을 구성한 토후국별로 ‘룰러(Ruler)’라 불리는 국왕이 있고 왕세제와 왕자가 있는 전형적인 왕정국가다. 형식적으로는 5년마다 7개 국가가 모여 대통령을 선출하지만, 토후국 중 가장 크고 석유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아부다비가 연방의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중동의 걸프 국가들이 왕정을 유지한다고 해서 민주화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거처럼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사법체제가 엄연히 존재한다. 따라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재판이 이루어지고 법에 정한 형벌을 내린다. 국왕이 통치하지만 법을 무시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 국민을 무시하는 행동을 국왕이라고 함부로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는다. 왕정의 존재 자체가 현대사회에서는 국민의 존경과 지지하에서만 유지될 수 있고, 그러한 사실을 왕가에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차기 국왕은 국민의 여망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으로 부족 회의에서 선출한다. 이런 제도는 국가 지도자의 독특한 선출 과정으로서 연구할 만하다. 대통령제나 의원내각제가 현대사회에서 가장 민주적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선출된 리더가 항상 최적의 지도자는 아니듯이, 부족 회의에서 선출된 국왕이 꼭 최적의 리더가 못 될 이유도 없다. 왕정 체제에서 살다 보면, 왕정 유지를 위해 왕정을 가장 잘 운영할 수 있고 국민의 여망에 가장 부합하는 지도자 자질을 갖춘 왕가의 인물을 뽑아 국왕으로 삼는 것을 잘못된 제도라고만 볼 수 없지 않냐는 생각을 한 번쯤 하게 된다. 아랍에미리트처럼 지난 반세기 동안 계속 훌륭한 지도자를 배출하고 있는 나라에서 특히 그렇다. 그리고 어느 나라나 간혹 잘못된 선택을 해서 국가를 파괴하고 국민을 괴롭게 하는 것은 대통령제냐 왕정이냐와 상관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면 말이다.

걸프 왕정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경제보다는 국가 안보와 정권의 안정이다. 전자는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 끼어 있는 지정학적인 이유와 끊임없이 시아파 확산을 시도하는 시아파 맹주인 이란에 대항하여 수니파 연합을 지켜내야 한다는 종교적인 이유에서다. 후자는 왕정의 영속성을 저해하는 위해(危害) 세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숙명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 국가 운영 제1의 가치는 ‘경제 발전’이었다. 최근 10년 사이에 빈부격차 해소와 공정사회 실현이라는 가치가 가미되었지만, 국민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목표는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선진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아울러 소득 격차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복지의 확대를 지향했다. 걸프 왕정국가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는 국가 안보 문제는 북한과 대치하며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체제의 안정은 다당제 민주국가인 우리에게 생소한 가치다. 따라서 걸프 왕정국가에 산다면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2011년에 ‘아랍의 봄(Arab Spring)’이 있었다. 중동에 휘몰아친 바람 때문에 장기 집권자들이 흔들렸다. 이집트, 예멘, 리비아의 독재자가 권좌에서 물러났고, 걸프 왕국도 프랑스 혁명 때처럼 바짝 긴장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아랍에미리트는 군인연금을 인상하고 낙후 지역에 대한 대규모 개발 계획을 발표하는 등 민심을 잡기 위해 총력을 펼쳤고, 한편으로는 반정부 세력화 가능성이 있는 외국인들을 미리 추방해 위기를 넘겼다.

한번은 한국 정부의 경제 발전 경험 전수 용역사업의 일환으로 한국의 연구진들이 아랍에미리트에 와서 ‘민간기업의 육성’이라는 주제로 1년간 연구하고 그 결과를 아랍에미리트 관리들 앞에서 발표했다. 세미나의 목적상 우리 연구진들은 현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했는데 갑자기 아랍에미리트 차관보급 고위 관리가 나에게 “지금 당신 나라 연구자가 우리 국왕이 만든 제도를 비판하는데 왜 가만히 듣고 있느냐”며 당장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발표자의 고압적인 표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전체를 다 들어보고 판단하자. 문제가 있다면 최종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정하겠다”며 넘어간 적이 있다.

걸프 왕정국가 중에서 정당이 허용되는 나라는 쿠웨이트뿐이다. 또한 한국의 국회에 해당하는 국가 조직이 있지만 우리의 국회와 기능이 다른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아랍에미리트에서 의회 기능을 담당하는 곳은 연방평의회(FNC: Federal National Council)인데, 정부가 낸 의안을 심의하는 기능은 있지만, 법안을 제안하거나 거부할 권한은 없다. 모두 4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절반은 선거인단 선거로, 나머지 절반은 7개 토후국 통치자가 지명하는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점을 알아야 왕정국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왕정국가가 민주국가보다 더 부패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문제는 나라의 지도자와 공공기관 종사자들이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하는가다. 리더가 청렴하고 공정하면서 국민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생각이 분명하면 아래 사람들이 부패할 수 없다. 능력 중심으로 사람을 배치하고, 성과와 태도를 보고 판단하는 시스템이 작동되면 왕정국가도 얼마든지 공정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 정부에서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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