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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아부다비 외교 현장에서 일하고 배우다>

02. ‘마즐리스’, 중동의 응접실 문화

by BOOKCAST 2022.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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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 가면 마즐리스(Majlis)라는 단어를 많이 접한다. 우리의 손님 대기실, 대청마루, 응접실 같은 명칭으로, 공항 대기실도 마즐리스라고 부른다. 사랑방 좌담회 같은 동네 모임도 마즐리스라고 하는데, 마즐리스를 주최하는 측은 대개 영향력이 큰 사람이거나 부호다. 마즐리스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큰 대청마루와 차를 대접하는 많은 하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매주 마즐리스를 개최하는 왕자가 있는가 하면, 무함마드 현 대통령도 왕세제 시절 매주 한 번씩 궁전 응접실을 개방해 마즐리스를 개최하곤 했다.

마즐리스는 조선시대에 양반 부자가 마을 사람들을 불러 음식을 나눠주면서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마을 사랑방 같은 행사를 연상케 한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주최자가 자리에 앉으면 하인들이 돌아다니며 차와 말린 대추야자를 대접한다. 차는 수시로 채워주므로 마시기를 중단하려면 의사 표시를 분명히 해야 한다. 아랍에미리트에서는 찻잔을 앞으로 내밀면 더 마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좌우로 흔들면 그만 마시겠다는 뜻이 되어 하인이 찻잔을 회수한다. 


사람들은 큰 응접실에 둘러앉아서 주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대화하다 정가운데 앉은 주최자의 옆자리가 비면 재빨리 다가가서 안부 인사를 한다. 충분히 얘기했으면 자기 자리로 돌아오거나 정중히 인사하고 먼저 자리를 뜨기도 한다. 이때 무슨 얘기를 나누느냐는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접하기 쉽지 않은 기회이므로 요점을 잘 전달해야 한다.

중동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은 마즐리스 문화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중동에서는 마즐리스를 통해 한 커뮤니티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오래된 전통이 있다. 외국인이 마즐리스 행사를 알고 있으면 현지인과의 네트워킹에 아주 유용하다. 별도의 면담을 주선하려면 특별한 용건이 있어야 하고 힘도 많이 들지만 이런 자리는 준비하는 집사에게만 미리 통보하면 쉽게 참석할 수 있다. 게다가 특별한 용건 없이 눈도장 찍기에도 아주 좋다. 주최자가 왕실 인사라면 특히 그렇다. 왕실 인사를 별도로 만나기는 쉽지 않다. 특별한 용건이 있어야 하고, 쉽게 면담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마즐리스는 주최자가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기로 한 행사이기 때문에 잠깐 얘기를 들어달라는 요청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실세인 왕세제가 직접 개최하는 마즐리스는 조금 달랐다. 우선 대부분의 왕자와 각료들이 배석하기 때문에 참석하려면 사전에 의전 비서실을 통해 허락을 받아야 한다. 참석 신청 후에 긍정적인 답변이 올지 장담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참석하고자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야 한다. 참석을 허락받았을 경우, 수백 명이 모이므로 접견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 대사들은 한 번에 4~5명 정도만 초대되기에 접견은 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순서를 잡아주는 의전관과 눈 사인이 잘 맞아야 하고 대화도 요령 있게 잘 정리해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

여름에는 무함마드 대통령이 왕세제 시절 본인의 관저 궁전에서 주최하는 학술형 마즐리스도 있었다. 커다란 대청마루에 주요 인사 200명이 넘게 참석하는데 통상 세계적인 석학을 초빙해 강연을 듣고 질의응답을 한다. 나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를 초청한 강연에 미국 대사와 함께 참석한 적이 있다. 아마 한국이 IT 강국이라고 해서 특별히 초대된 것 같았다.

국내 한 유명 정유회사 사장이 나의 권유로 마즐리스에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중동을 20년간 자주 드나들었는데도 이런 행사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비즈니스 목적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중동을 다녔으면서도 마즐리스를 몰랐다는 게 나는 더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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