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에세이/<그림에 끌리다>

09. 마르셀 뒤샹-이것이 예술인가?

by BOOKCAST 2020. 6. 18.
반응형

 


 

마르셀 뒤샹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2〉 1912년, 146×86㎝, 캔버스에 유채,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뒤샹의 초기 작품으로 카메라 기술의 발달로 동시적인 촬영을 이용한 작품이다. 속도감과 운동감을 회화로 표현한 그의 그림에 대해 입체파 화가들은 정숙하지 못한 우스꽝스러운 그림이라고 혹평했다.
 
“예술가란 말은 화가가 개성적인 존재가 되면서 생겨났다.
회화는 끝났다.
누가 이 프로펠러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 마르셀 뒤샹

 

뒤샹은 현대사회에 팽배한 상업주의와 회화의 상품화에 대한 반발로 회화를 버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병을 말리는 기구를 사서 병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며, “색을 칠하거나 구성을 할 수도 있지만 단지 선택만 할 수도 있다.” 궤변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렇게 선택한 작품에 레디메이드라는 용어를 붙였다. 1917 4 10, 파리의 앙데팡당 전시를 모델로 한 독립작가 협회라는 새로운 조직이 태어났다.
 
뉴욕 그랜드 센트럴 갤러리에서는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앙데팡당전이 열리고 있었다. 뒤샹은 젊고 패기만만한 이 전시회 관계자들에게 자극을 주기로 결심하고 (Fountain)을 출품했다. 20세기 현대미술에서 가장 큰 혼란을 던지고 가장 많은 칭찬과 혹평을 들었으며, 대중들에게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작품 은 이때 등장한다.
 
그는 공중 화장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성용 변기를 떼어 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R MUTT’라는 이름으로 사인하고, 작품이라며 시치미를 뗐다. ‘R MUTT’라는 것도 실은 뉴욕 변기 제조업자인 리처드 머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마르셀 뒤샹 〈샘〉 1917년, 63×48×35㎝, 조르주 퐁피두센터 소장

 

 

운영위원들은 난감했다.
 
이 작품을 걸 것인가?
바닥에 놓을 것인가?
아니면 이런 작품을 전시해도 되는 것인가?

 
변기는 전시 기간 내내 전시장 칸막이 뒤로 폐기되는 운명에 처했다. 전시가 끝나자 뒤샹은 미국인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란 글로 반격에 나섰다.
 
참가비 6달러를 낸 화가는 작품을 전시할 권리가 있다. 어떤 근거로 리처드 머트의 작품 을 거부한 것인가? 혹자는 그것이 부도덕하고 상스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머트의 은 부도덕하지 않다. 머트가 그것을 직접 자기 손으로 제작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는 평범한 생활용품을 사용해 새로운 이름과 개념을 창출해냈다.”
 
“예술품이란 색을 칠하고 구성할 수도 있지만
단지 선택만 할 수도 있다.”는
뒤샹의 말은 혁명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