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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투머치머니>

05. 거래를 위한 거래를 가능하게 해 돈을 뜯는다.

by BOOKCAST 2022.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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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 숫자는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암호화되어 해킹이 불가능한 가상의 돈을 표방했다. 동시에 화폐 혹은 통화라는 단어는 쓰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잘못했다가는 처음부터 국가의 돈을 위조한다는 죄로 문을 닫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들이 약삭빠르게 선택한 단어는 동전이었다. 국가가 잔돈푼처럼 느껴지는 가상 동전에 손을 대는 건 도대체 폼이 나지를 않았다. 골동품 같은 옛날 동전을 사고파는 것이 불법은 아니었다. 실제와 동떨어진 암호 숫자의 동전 모양 그림 파일은 돈 같은 느낌을 주는 데 백서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그들의 주장과 달리 암호 숫자는 돈이 되지 못했다. 집 앞 편의점에서 돈 대신 사용하게 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돈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가격이 변하는 것은 그 불안정성 때문에 돈으로서의 자격 미달이었다.

16세기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집사 금융인이었던 토머스 그레셤이 밝힌 ‘그레셤의 법칙’도 같은 결론을 가리켰다. 두 종류 이상의 돈이 유통되고 있을 때 그것이 모두 돈으로 사용되는 일은 없고 언제나 한 종류만 사용된다는 법칙이었다. 값이 오르는 것은 내다 쓰지 않고 장롱 속에 숨겨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왕립거래소를 세운 장본인인 그레셤은 왕립거래소의 자릿세로 매년 112만 원을 거두었다. 당시 63명의 숙련된 장인 연봉에 준하는 돈이었다.

암호 숫자를 돈으로 인정받게 하려는 시도는 그 뒤로도 있었다. 그중 한 가지가 법정화폐에 연동하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자체로 모순이었다. 암호 숫자의 일부에 해당하는 법정화폐만 가진 경우 결과적으로 법정화폐를 위조하는 꼴이 되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암호 숫자 전체에 해당하는 법정화폐를 가지는 경우 암호 숫자는 온라인상품권과 다르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간에 값이 오르지 않는 암호 숫자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제 암호 숫자에 남은 것은 언젠가 값이 오를 거라는 것이 전부였다. 동전이나 통화 대신 슬쩍 가상 자산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값이 오를 것이라는 유일한 근거는 암호 숫자가 늘어나지 않게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이유가 된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산업폐기물이나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이산화탄소도 값이 오를 터였다. 둘 다 유한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암호 숫자가 유한하다는 것도 결과적으로 보면 사실과 거리가 있었다. 개별 암호 숫자는 유한할지라도 암호 숫자의 종류는 나날이 늘어났다.

즉 암호 숫자는 오직 거래소의 거래를 통해서만 그 존재 의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도박이 아니라면 세상에 도박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암호 숫자 거래소도 다른 거래소처럼 수수료를 받았다. 그런데 통상의 증권거래소와 한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수수료를 돈으로 받지 않고 암호 숫자로 받는다는 점이었다. 자기들이 암호 숫자를 돈이라고 주장하고 있기에 얼핏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요상한 일이었다. 거래가 계속될수록 거래자의 암호 숫자는 점점 거래소의 차지가 될 터였다. 수학적 확실성으로서 언젠가는 모든 암호 숫자가 거래소 것이 된다는 말이다. 왜 거래소가 끊임없이 새로운 암호 숫자의 발굴에 목을 매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 외에도 암호 숫자 거래소로 돈을 불리려 할 때 전통적인 수법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제드 맥케일럽은 2007년 마운트곡스라는 도메인을 샀다. 매직더개더링이라는 컴퓨터 카드 게임의 거래소를 만들려는 생각이었다. 매직더개더링의 카드 거래는 많지 않았기에 맥케일럽의 수수료 수입도 신통치 않았다.

2010년 후반, 맥케일럽은 마운트곡스의 거래물을 비트코인이라는 암호 숫자로 바꾸었다. 그쪽이 거래가 더 많이 일어날 것 같아서였다. 결과는 맥케일럽의 기대대로였다. 늘어난 거래 건수만큼 가격도 올라갔다. 2011년 맥케일럽은 마운트곡스 도메인을 1985년생 프랑스인 프로그래머 마크 카펠레에게 팔았다. 카펠레가 도쿄에 세울 마운트곡스 회사의 주식 12퍼센트를 받는 조건이었다.


마운트곡스의 암호 숫자 거래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물론 그만큼 암호 숫자 가격도 계속 올라갔다. 2010년 맥케일럽이 마운트곡스의 거래물을 바꾸기 전에 10원이었던 암호 숫자 1은 카펠레가 살 즈음에 1,200원으로 120배가 올랐다. 2011년 2월부터 2013년 말까지 암호 숫자 가격은 1,200배가 더 올랐다. 2014년 초, 마운트곡스의 암호 숫자 거래량은 전 세계 거래량의 80퍼센트에 달했다.

그러다가 2014년 2월, 마운트곡스는 갑자기 파산을 선언했다. 해킹이 불가능하다던 암호 숫자 프로그램이 해킹되어 암호 숫자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사라진 혹은 빼돌린 암호 숫자의 대부분은 복구되지 않았다.

이렇게 돈을 불리는 회사를 영어로 롱펌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롱은 ‘길다’는 뜻과 아무 상관이 없고 펌도 ‘회사’와 별 상관이 없다. 롱은 ‘사기를 치는’을 뜻하는 고대 앵글로색슨어 겔랑에서 유래된 의미로, ‘흠이 있는’ 혹은 ‘실패한’을 뜻한다. 펌은 ‘서명, 사인’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피르마를 줄인 말이다. 즉 롱펌은 ‘실패한 서명’이란 뜻이다. 한동안 정상적인 거래를 하면서 비즈니스 신뢰를 얻은 뒤 어느 날 갑자기 문 닫고 받은 물건을 가지고 달아나는 전통적인 수법을 가리키는 말이 롱펌이다. 롱펌이 단어로 처음 인쇄된 책은 도둑들의 속어와 은어를 정리한 영어사전이었다.

2019년 3월, 도쿄지방법원은 마운트곡스의 암호 숫자를 부풀린 혐의로 카펠레에게 30개월 징역형에 4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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