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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투머치머니>

07. 결과를 아는 상태에서 베팅을 한다. (마지막 회)

by BOOKCAST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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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이 손에 묻기 마련이다. 인수합병 쪽 일을 하다 보면 돈 불리는 효과적인 방법 한 가지가 저절로 눈에 들어온다. 인수합병 소식을 남들보다 먼저 알아내 미리 거래를 하는 방법이다. 바로 내부자거래다.

내부자는 비단 회사의 임직원이나 주식의 10퍼센트 이상을 가진 주요 주주로 한정되는 개념이 아니다. 회사에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계사나 변호사를 비롯해 공무원, 증권사 직원까지 다 내부자로 간주될 수 있다. 한국 자본시장법은 내부자라는 표현 대신 ‘미공개 중요 정보 이용행위’라는 명칭을 쓴다. 거둔 이익이 50억 원 이상이면 무기징역에 이익의 3배까지의 금액을 벌금으로 내야 한다. 물론 내부자거래가 인수합병 때만 하는 것은 아니다. 부도나 특수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령 부도 직전에 경영진이 회사 주식을 파는 것도 내부자거래다. 손실을 면한 금액을 이익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벤트 드리븐과 내부자거래는 한 쌍의 형제와 같다. 잡히면 내부자거래요, 잡히지 않으면 이벤트 드리븐이다.

포세이돈 사례를 떠올려보자. 1주당 30원짜리 동전주가 니켈광 뉴스에 힘입어 약 9,333배인 280,000원까지 올라갔던 사례였다. 이때 다양한 내부자거래가 있었다. 포세이돈이 일을 시켰던 탐사회사의 소유주는 포세이돈의 9월 29일 공시 이전에 다량의 포세이돈 주식을 샀다. 퍼스증권거래소 회장도 미리 샀다가 포세이돈 주가가 망가지기 전에 빠져나왔다. 이들은 모두 처벌되지 않았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의 법규상 내부자거래가 불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우리는 그립다. 요즘도 웬만하면 잘 안 잡히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다.

금융에서 내부자거래는 역사도 깊다. 1743년 영국 데번 태생으로 이튼칼리지를 졸업한 윌리엄 두어는 1770년대 초반부터 미국에서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후인 1778년과 1779년에는 대륙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급기야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해밀턴이 1789년 미국의 초대 재무 장관이 되었을 때 두어를 첫 번째 재무차관보로 임명했다.

두어는 6개월 만에 물러났다. 재무차관보로서 얻은 정보를 이용해 개인 계좌에서 부실채권을 잔뜩 사들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물러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정부 돈으로 자신이 가진 부실채권의 값을 올렸을 터였다.

물러났다고 해서 두어가 가진 미국 재무부의 내부정보가 어디 가지는 않았다. 두어는 해밀턴이 창립주주로 있는 뉴욕은행을 목표로 삼았다. 뉴욕은행은 1792년에 생긴 뉴욕증권거래소에 최초로 상장된 회사였다. 두어는 밀리언은행의 설립을 시도하며 뉴욕은행의 주가가 떨어지도록 작전을 폈다. 헐값에 주식을 많이 사들여 뉴욕은행을 지배하든가 혹은 밀리언은행 설립이 중단되면 큰 폭으로 뛰어오를 뉴욕은행 주가로부터 큰돈을 불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봤다. 그의 작전은 미국 최초의 주식공황인 1792년 주식공황을 불러오며 실패했다. 작전에 쓴 빌린 돈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갇힌 두어는 1799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인물로 앨버트 위긴이 있다. 1868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난 위긴은 1903년 뱅커스트러스트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11년에는 3장의 벌링턴철도 스퀴즈 때 나왔던 제임스 힐이 지배하는 체이스내셔널은행의 은행장이 되었다. 1929년 주식공황 때 그는 빼어난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자신이 은행장으로 있는 체이스내셔널은행의 주식을 42,000주 이상 공매도했다. 거래의 주체는 자신의 가족 소유로 되어 있는 캐나다 국적 페이퍼컴퍼니였다. 그는 이 거래로 48억 원 이상을 불렸으며 캐나다 국적이라 공매도의 이익은 세금이 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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