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불멸의 성>

02. 조선 초기의 성 스캔들 - 내시와 후궁, 공신의 첩과 태종(太宗)

by BOOKCAST 2022. 11. 15.
반응형

 


 


왕자의 첩과 간통하고 임금의 후궁과 통정한 내시 정사징(鄭思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한 때는 1392년. 조선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유교는 성과 여성에 대해 억압적이었으나 조선 중기 까지도 조선 왕실과 양반, 일반 백성들의 성 풍속은 고려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풍속이란 것이 왕조가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 왕족과 궁녀, 내시, 양반들 사이에 간통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는데 근친간의 사통, 동성애가 불러일으킨 치정 등이 실록(實錄)에 기록되어 전한다.

조선 초의 내시(內侍)들 중에는 거세되지 않은 자가 있었기 때문에 통정(通情) 사건이 계속되었다.

『태종실록』에는 내시 정사징이 태조의 넷째 아들 방간의 첩과 간통하였고 정종을 섬기던 궁녀 기매와 간통하여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런데 기매를 죽이려 할 때 정종의 부탁으로 살려주었다고 하는데 2대 정종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였다. 기매는 왕자 두 명과 통정하고 내시 정사징과 사통하였으니 내시가 왕자들(그 중 1명은 정종)과 동서가 된 꼴이었고 기매는 정종의 아이를 가진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환자(宦者) 정사징(鄭思澄)을 베었다정사징은 고려 공양왕 때부터 환자(宦者) 같지 않다는 말이 있었는데또 회안 대군의 첩을 간통하였고인덕궁(仁德宮)을 섬기면서 시녀 기매(其每)를 간음하였다기매는 상왕(上王)의 본궁(本宮) 종(婢)이었고 상왕이 알고 기매를 내치니정사징이 도망하였다이때에 이르러 붙잡히자 곧 베었다의금부 제조에서 기매를 아울러 베자고 청하니임금이, “기매는 상왕에게서 아이를 배어 자식을 낳았으니 차마 못하겠다.” 하였다제조提調등이 청하기를, “기매가 이미 죄를 지어 쫓겨났으니상왕인들 어찌 아끼겠습니까?”하니임금이 옳다고 여기어 장차 베려 하다가 마침내 상왕의 명령으로 베지 못하였다.
태종실록』 17년 8월 8
 

공신들이 쟁탈전 벌인 기생을 후궁으로 삼은 태종

『태종실록』 7년 12월 2일자에는 “대호군 황상을 파직하고, 총제 김우의 갑사 양춘무 등을 수군에 편입시키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황상이 기생 가희아(可喜兒)를 첩으로 삼았는데 그는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 회군에 공을 세운 공신이었다. 그런데 총제 김우와 가희아는 몰래 정을 통하는 사이였고 김우가 동짓날 황상의 집으로 가던 가희아를 납치하려다 실패하였다. 김우도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신이었다. 양춘무는 김우의 개인 명령에 따라 밤에 황상의 집을 포위하였고, 또 길거리에서 서로 더불어 격투하여 그 은대(銀帶)를 쳐서 떨어뜨렸으니 실로 부당하다고 사헌부에서 보고하였다. 또한 황상은 3품관으로 조정길에서 첩과 다투었으니 정직(停職)시키라는 내용이었다. 기생 쟁탈전으로 공신과 그 부하들이 파직과 강등의 수난을 자초한 꼴이었다. 그런데 2년 뒤 태종이 후궁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홍씨를 혜선옹주(惠善翁主)로 삼았으니보천의 기생 가희아(可喜兒)였는데처음에 가무를 잘하였기 때문에 총애를 얻었었다.
-『태종실록』 14년 1월 13일자
 
그야말로 요즘으로 치면 막장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사건은 여색을 탐한 공신과 왕의 도덕성에 앞서 그 당시까지도 고려의 자유분방한 성 풍속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11대 중종 때까지도 그 풍속이 변하지 않았음을 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근래 풍속이 아름답지 않아서종친사대부가 서로 처첩(妻妾)을 훔쳐 음란한 풍속이 지극히 성행한다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의 처첩을 혹 그 부모를 꾀거나 그 신의를 지키는 것을 범하여 핍박하여 간통하는 자도 이따금 있으므로이미 헌부(憲府)를 시켜 이문(移文)하였으나 관찰사가 된 자가 심상하게 여기니관찰사에게 교시를 내려 그 궁벽한 마을에도 서로 처첩을 훔치는 자가 있거든 추문(推問)하여 알아내어 계문(啓聞)하게 해야 한다.
중종실록』 23년 11월 4일자
 
위 내용은 간통한 자의 죄를 따지라는 왕명을 내린 것으로 당시의 풍속을 언급하고 있는데 때는 1528년이니까 조선 건국 후 130년이 지나도록 유교의 이념은 정착되지 못했고 성 풍속은 여전히 고려의 풍습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여성들에게 교화의 목적으로 보급되었던 『열녀전』도 속담에서는 ‘열녀전 끼고 서방질하기’라고 할 정도였으니 풍속 중에서도 성에 대한 규제만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억압할수록 금기를 넘어서려는 욕구 또한 그만큼 강할뿐더러 성적 욕망은 인간의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철저한 신분제 사회로 각각의 신분에 따라 법적 사회적 차별을 두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라는 관점에서는 양반이나 서민이나 똑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런데 성적 욕망을 서민들은 솔직하고 과감하게 표현하는 한편 양반의 위선에 대해 풍자와 해학으로 비판하였다. 이는 판소리와 탈춤을 통해 알 수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