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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불멸의 성>

03. 조선의 동성애 - 궁녀의 대식(對食), 남색(男色)을 하는 양반, 남사당패, 승려들

by BOOKCAST 2022.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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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들의 동성애

조선 중기까지도 성 풍속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왕실과 공신들의 스캔들 못지않게 끊임없었던 것이 궁녀들의 성 추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궁녀들 간의 동성애는 구한말까지도 계속되었다. 궁녀의 동성애를 대식(對食)이라 하였는데 원래는 궁녀들이 가족이나 친지를 궁궐 안으로 불러들여 같이 식사하는 제도였다. 그런데 그것이 변질되어 동성애의 기회로 삼았기 때문에 대식이라 하였다.

조선 초에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은 문종의 2번 째 부인인 세자빈 봉씨의 폐출이었다. 『세종실록』 18년(1447)10월 26일자에 그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봉씨가 궁궐의 여종 소쌍을 사랑하여 항상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니, 궁인들이 혹 서로 수군거리기를,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소쌍 역시 세자의 후궁인 권승휘의 궁녀 ‘단지’와 서로 좋아하여 혹시 함께 동침(同寢)하였으니 이른바 세자빈과 궁녀들의 삼각 치정(癡情) 관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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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세자빈이 또한 이러한 풍습을 본받아 이와 같이 음탕할 줄 생각했겠는가이에 빈을 불러서 이 사실을 물으니대답하기를, “소쌍이 단지와 더불어 항상 사랑하고 좋아하여밤에만 같이 잘 뿐 아니라 낮에도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습니다이것은 곧 저희들의 하는 짓이오며 저는 처음부터 동숙한 일이 없었습니다.”
세종실록』 18(1447) 10월 26일자
 
위 내용은 봉씨가 자신의 죄는 감춘 채 궁녀들의 동성애를 고하는 내용이지만 세종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봉씨를 폐서인하였다. 세자빈 봉씨가 술을 마시고 궁녀와 동성애를 하게 된 원인도 따지고 보면 세자인 문종이 학문에만 몰두하고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자빈으로서의 행실(行實)에 문제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항상 듣건대시녀와 종비(從婢) 등이 사사로이 서로 좋아하여 동침하고 자리를 같이한다고 하므로이를 매우 미워하여 궁중에 금령을 엄하게 세워서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살피는 여관(女官)이 아뢰어 곤장 70대를 집행하게 하였고그래도 능히 금지하지 못하면 혹시 곤장 1백 대를 더 집행하기도 하였다.
세종실록』 18(1447) 10월 26일자
 
위 기록은 세종대에 궁녀들의 동성애가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궁녀들 사이에는 ‘대식(對食)’이라 불렸고 서로를 방동무, 벗, 맷돌부부 등으로 부르며 지냈다. 대식은 『한서(漢書)』에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궁녀들이 서로 부부가 되는 것을 대식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1788~?)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대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궁중의 옛 규례에 환관과 궁녀가 서로 부부가 되는 것은 한나라 시대부터 그러하였는데이를 대식이라 한다그런데 궁녀는 환관을 통하여 물품을 사들이고 환관은 궁녀에게 의뢰하여 옷을 꿰매 입는 등 민간의 부부와 다름이 없었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는 궁녀들 사이에서 ‘친구’를 의미하는 붕(朋)자를 팔에 새기는 경우가 많았으며 동성애를 한 궁녀들의 몸에 먹으로 글자를 새기게 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법을 어기고 벗을 사귀었다는 ‘위법교붕(違法交朋)’ 네 글자였다. 먹으로 몸에 글자를 새기는 묵형(墨刑)이었다. 다른 말로 자자(刺字: 글자를 새긴다)라고도 하여 중벌에 속했다.
 
두 궁녀를 밀위청(의금부 당직청)에 보내 위법교붕(違法交朋)’ 네 글자를 가슴에 새기도록 입묵(入墨)하였다.
연산군일기11년 7월 13일자
 
『영조실록』 에는 궁녀들의 동성애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조현명(趙顯命)의 상소문이 기록되어 있다.
 
예전부터 궁인들이 혹 족속이라 핑계하여 여염(閭閻)의 어린아이를 금중(禁中: 대궐)에 재우고 혹 대식(對食)을 핑계하여 요사한 여중이나 천한 과부와 안팎에서 교통합니다이것은 다 요사한 자에게서 인연하고 간사한 자에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삼가 바라건대전하께서는 그 출입의 방지를 준엄하게 하여 그 왕래하는 길을 끊으소서그러고서야 부정한 길을 막을 수 있고 뒷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근습(近習)을 엄하게 다룬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영조 3년 7월 18일자
 
조선 후기까지도 궁녀들의 동성애는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양반남사당패승려들의 남색(男色)

한편 양반의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조선 초에 나타났는데 세종대에 이선(李宣)을 병조판서로 임명하였더니 사람들이 동성애를 하는 그 행실을 비판하였다.
 
평상시 집에 있을 때는 방 한 칸을 따로 두고서 얼굴 반주그레한 사내종 하나를 데리고 가면서 거처하기를 처첩(妻妾) 같이 하니 동네에서 그 종을 가리켜 이 정승의 첩이라고 이르고그 종놈은 안방에도 거침없이 출입하게 되고 그의 처와 동침하게까지 되어 추잡한 소리가 자못 밖에까지 들리되선(宣)이 금하지 않고 또한 꺼리지도 아니하며,...
세종실록』 29(1447) 4월 18일자
 
조선시대에 남성의 동성애는 남색(男色), 때로는 남총(男寵), 계간(鷄姦), 혹은 비역질이라 표현하였다. 일반적으로 남사당패에서 볼 수 있는데 ‘삐리’라고 부르는 소년들이 주로 여장을 하고 공공연히 마을의 남정네들과 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양반이 아내가 죽은 후 이웃의 소년과 동성애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19세기 말 육용정(陸用鼎,1842 ~1917)의 「이성선전(李聖先傳)」은 이성선이라는 선비와 이웃 소년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렸다. 소년이 다른 남성을 좋아하게 되자 이성선은 소년을 칼로 찔렀던 것이다. 저자는 동성애를 풍남지희(風男之戱)라 표현하였다.

또한 이규경(李圭景,1788~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남색에 대해 “이것이 무슨 아름다운 풍속이라고 온 천하가 풍습을 같이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민간의 무뢰배들이나 사찰의 추한 중들이 서로 이런 짓을 할 뿐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조선에서 남성의 동성애도 적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민간의 설화를 집대성한 『고금소총(古今笑叢)』에는 절에서 행하던 후정(後庭)놀음에 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는데 승려들 간의 동성애를 뜻한다.
민속학자 이능화(李能和1869~1943)는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 구한말에도 남색이 성행하였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미동(美童)이 하나 있으면 여러 사람이 질투하여 서로 차지하려고 장소를 정하여 각법(脚法)속칭 택기연(택견)으로 자웅(雌雄)을 겨뤄 이긴 자가 미동을 차지한다조선조 철종 말년부터 고종 초까지 대단히 성했으나 오늘날에는 볼 수 없다.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
 
우리가 배웠던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조선시대 동성애는 암암리에 널리 퍼져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성애가 궁녀, 남사당패, 사찰에서 많이 행해졌다는 사실은 폐쇄된 집단 속에서 이성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성욕이라는 인간의 본능은 법이나 제도로 막을 수 없는 영역에 속한 문제이고 동성애는 그 욕망을 분출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을 뿐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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