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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떠난 뒤 맑음>

04. 여행이 끝날 때까지는 절대 돌아가선 안 된다.

by BOOKCAST 2022.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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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시에 일어날 예정이었는데 레이나가 눈을 떴을 때는 일곱 시도되기 전이었다. 블라인드 탓에 방 안은 어둡다. 그래도 사물의 형체가 전부 또렷이 보일 정도로는 밝았다.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이츠카짱이 깰세라 살그머니 창가로 간다. 블라인드 옆 틈새로 바깥을 보니 이미 해님이 떠올라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후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본다. 많이 큰 목욕 가운을 입고 선 것은 분명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자신인데 지금 집을 떠나 이런 장소에 있다는 것이 어쩐지 믿어지지 않았다.

 

레이나 방에서 수도 없이 작전 회의를 했을 때 ― 그 방바로 어제까지 그곳에 있었으면서 벌써 그리워진다 ―, 이츠카짱과 둘이서 이번 여행에 관한 여러 가지 규칙을 정했다예를 들면 이런 거다(이 밖에도 몇 가지 세부 사항이 더 있지만노트를 보지 않으면 다 기억해 내기 어렵다).

짐은 최소한으로 한다.
육로를 이용한다(이것을 주장한 건 이츠카짱이다. 항공편이 빠르고 편리한데).
누가 물으면 이츠카짱은 스물한 살이라고 대답한다.
누가 물으면 일본에서 온 관광객이라고 대답한다.
집에 전화할 때에는 공중전화를 이용한다.
휴대 전화는 긴급할 때에만 사용하고여행하는 동안에는 전원을 꺼둔다(GPS기능이 딸려있을지도 모르므로).
편지는 언제 어느 때 써도 상관없지만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언급한다거나 다음 행선지를 밝혀선 안 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규칙은,
앞으로 이 여행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은 영원히 둘만의 비밀로 한다.
만약 도중에 돌아가고 싶어지더라도 여행이 끝날 때까지는 절대 돌아가선 안 된다.
라는 것이었다.

여행은 즐거웠지만, 규칙을 떠올릴 때면 레이나는 조금 긴장이 된다. 규칙이란 깨면 안 되는 것이므로, 깰 생각 따위 없다 해도 중요한 것이다 싶으면 그 점만으로도 긴장하고 만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나는 중요한 것이 늘 두려웠다.
이츠카짱은 8시 10분 전에 일어났다(몇 시에 알람을 맞춰놓든 그 시간이 되기 조금 전에 눈이 떠지는 체질이란다). 둘이서 차례대로 샤워를 한 후 아침식사는 거르고 체크아웃했다. 엄마가 알면 화를 낼 거라고 레이나는 생각한다. 집에서는 절대로 아침을 거를 수 없으니까. 먹고 싶지 않아도, 시간이 없어도.
해브 어 나이스 데이(Have a nice day).”
호텔 직원의 인사말을 등 뒤로 들으면서 문을 나서자 바깥은 눈이 부실 정도로 맑았다.
아침!”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한다지금이 아침인 건 알고 있었고이츠카짱 또한 당연히 알고 있으련만.
걷다 보니 거리의 냄새가 점점 달라졌다신선한 바깥 공기, 음식물 쓰레기배기가스커피와 페이스트리그리고 지하철 입구에서 비어져 나오는 퀴퀴한 냄새.
금방 돌아올 거니까.
계단을 내려가면서 마음속으로 가족에게 말했다가족에게하지만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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