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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떠난 뒤 맑음>

06. 고래 보러 가자

by BOOKCAST 2022.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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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때는 4시 정각이었고. 그런데도 이미 땅거미가 짙다. ‘춥다는 것이 이츠카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왜 이리 컴컴해?”
라는 것이 레이나가 한 말이었다. 자다 깬 멍한 표정이다. 터미널 안 벤치에 앉아 이츠카는 접이식 지도를 펼쳤다. 원래는 걸어서 차이나타운을 지나 그 부근에 밀집한 호텔 중 한 곳에 방을 잡을 예정이었다. 거기다 짐을 놔두고 거리를 좀 걸으며 상황을 파악한 뒤 조금 이른 저녁(이랄까, 오늘의 첫 끼니)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가 내리고 있어서 우산 없이는 추우니 가깝더라도 지하철을 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저기, 레이나.”
걷는 게 좋은지 지하철을 타는 게 좋은지 물어보려고 고개를 들어 보니, 옆에 있어야 할 레이나는 어느 틈엔가 안쪽 자판기 앞에서 젊은 백인 일행 세 사람(남자 둘에 여자 하나)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레이나!”
소리쳐 부르자 스티로폼 컵에 든 핫초콜릿을 손에 들고 되돌아와서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츠카짱, 있잖아, 저 사람들 고래를 보러 왔대. 고래 보러 가자, 레이나 너무 보고 싶어. 너무너무 보고 싶어.”
이츠카는 이 사촌 여동생이 옛날부터 몸집이 큰 동물을 좋아했다는 걸 기억해 냈다.
하지만 그 전에 숙소부터 정해야 해.”
이츠카 말에 레이나는,
알겠어.”
라고 대답하고, 들고 있던 컵을 내밀었다.
마셔. 따뜻해지니까.”
그 말을 남기고 좀 전의 그 세 사람 곁으로 다시 가 버렸다. 이츠카는 거품이 이는 그 달달한 액체에 입을 댄다. 밍밍한 게 싸구려 맛이 났지만 뜨거웠고, 텅 빈 위장에 스며들었다.
결국 지하철을 선택했다. 레드라인으로 파크 스트리트까지 두 정거장. 맨 처음 눈에 띈 호텔에 빈방이 있었다. 가이드북에 최고급이라고 쓰여 있던 호텔로 아담했다.
아직 시간 있으니까, 먼저 목욕해도 돼?”
호텔 방에 들어서자 레이나가 말했다. 시간이 있다는 건 저녁식사 때까지라는 의미이고, 레이나는 아까 그 세 사람과 함께 식사하기로 약속을 잡아 버렸다.
어차피 이것저것 물어봐야 하잖아? 고래 보러 갈 배편이라든지.”
지하철 안에서 그렇게 설명했다. 마크, 퍼거스, 리비. 그게 그 사람들의 이름이며, 리비와 마크가 남매지간이고 퍼거스와 리비가 커플이라는 것도.
좋을 대로 해. 난 그동안 산책 나갔다 올게.”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산책? 하지만 비 오는데.”
상관없어.”
쌀쌀맞게 대답한다. 침대에 앉아 지도를 펼쳤다. 호텔 주변 길을 어느 정도 알아 두고 싶었다.


우산은?”
프런트에서 빌릴 거야.”
레이나는 좀처럼 욕실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천 가방 안을 뒤적거리는가 하면 TV를 켰다가 금세 꺼 버린다. 그러더니 불쑥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화났어?”
별로.”
대답하고 지도를 접는다. 화낼 생각은 없었지만 낯선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는 건 내키지 않았다. 레이나가 침대로 올라온다.
화내면 안 돼.”
그러면서 이츠카를 뒤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꽉 끌어안았다. 어린아이처럼 가느다란 팔다리로. 이츠카는 레이나째 벌렁 드러누우려 했지만 등을 젖히자마자 그만 침대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꺄악꺄악 난리치는 레이나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대로 레이나의 어깨에 기대어 이츠카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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