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집 떠난 뒤 맑음>

05. ‘본다’는 것은 유일한 ‘Yes’다.

by BOOKCAST 2022. 1. 27.
반응형

 


 

장거리 버스의 뱃속에 짐들이 차곡차곡 실린다. 그러나 이츠카는 자신들의 차례가 되자 짐을 맡기길 거부했다. 다른 승객들의 짐에 비해 자신들의 짐은 훨씬 작기도 했고 이것저것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어서 손닿지 않는 곳에 놔두고 싶지 않았다. 수염을 기른 중년 직원이 목을 살짝 움츠리더니, 그럼 그냥 타라고 말하는 듯이 엄지로 어깨 뒤를 가리킨다. 30번 게이트는 지하 2층으로 밤처럼 형광등이 적막하게 비추고 있다. 바깥의 맑은 하늘이 거짓인 양.
먼지 냄새 나.”
차에 오르면서 레이나가 말한다.
그보단, 디젤 엔진 냄새 같은 걸.”
이츠카가 대답했다. 냄새는 코라기보다 입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차 안 전체가 보이는 자리여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는다. 저마다 배낭을 무릎 위에 올린 채. 레이나는 배낭 외에도 천 가방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 메고 있다.
저쪽 끝에 기대.”
이츠카는 레이나에게 지시하고 자신은 반대쪽 창가에 기댔다. 만약 버스에 빈자리가 많으면 무릎 말고 옆자리에 짐을 놔둘 수 있게. 레이나는 일단 그 지시에 따랐으나 이내 불안한 얼굴을 하고, 둘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 앉기 전에 이츠카 옆으로 돌아왔다.
혼자는 싫어.”
라고 한다. 그리고 곧바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차피 버스는 만석이었다. 승객이 전부 탑승하자 운전기사가 마이크로 주의사항을 나열했다. 휴대 전화 사용은 절대 금지라느니, 술을 마시는 것도 금지라느니, 소리 나는 게임도 하면 안 된다느니. 대충 보니, 승객의 반이 학생이고 나머지 반은 노인이었다.
시각표가 맞다면 이 버스는 오후 4시에 보스턴에 도착한다.
딱히 보스턴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어딘가에 가려면 그 어딘가가 어디인지 정해야 하고, 정하지 않고 찾아 나선다 해도 우선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정해야 한다. 그래서 레이나가 메인 주에 가고 싶다 했으니 그곳에 가깝게 일단 북상해 보기로 한 것이다.
육로를 이용하기로 결정한 건 이츠카다. 육로로 이동하면 풍경이 보인다. 이 나라가. 적어도 그 일부가. 가고 싶은 장소나 가고 싶지 않은 장소가 따로 없고 딱히 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어서, ‘No’만 있는 이츠카에게 본다는 것은 유일하게 ‘Yes’였다. ‘Yes’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
이 기념해야 할 첫 버스는 그리하여 이츠카에게 실망을 안긴다. 지하를 출발하고 나서 한동안 터널 상태로 길이 이어지고, 마침내 지상으로 나왔나 싶으면 그 후로는 줄곧 고속도로여서 한없이 이어지는 펜스와 먼 나무숲, 게다가 화려하고 거대한 간판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다고는 해도 무릎에 얹어 두기엔 크고 무거운 배낭 밑으로 레이나가 이츠카의 손을 꼭 붙잡는다.
걱정 돼?”
손을 잡힌 채 묻자,
전혀.”
라고 레이나는 대답한다.
그냥, 조금 두근거리기 시작했어.”
라고.
이츠카는 고모 부부를 생각했다. 보나마나 화가 나 있을 것이다. 불량한 조카딸을 맡자마자 이 무슨 일이냐고 (특히 고모부는) 생각할 것이다. 미국에 오고 나서 갑자기 교회를 좋아하게 된 듯한 고모는 틀림없이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을 테지.
돌아가고 싶어지면 돌아가도 돼, 레이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며 그렇게 말하자,
어째서?”
하고 벌컥 성이 난 듯한 목소리가 돌아오면서 이츠카의 손을 덮고 있던 레이나의 손이 떨어진다.
왜 그런 말을 해? 규칙을 정했으면서. 벌써 까먹은 거야?”
레이나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건 아닌데.”
차 안은 놀랍도록 조용하다. 자신들 두 사람과 초로의 커플 한 쌍 외에는 전부 혼자 타고 가는 사람들 뿐이라서일 테지.


배고프다.”
레이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등받이에 기대고는 다시 배낭 밑으로 이츠카의 손을 잡았다.
도착하면 뭐든 먹자.”
뭘 먹고 싶은지 묻자레이나는 잠시 고민하다 팬케이크라고 대답했다.
그토록 맑았던 하늘이 어느새 흐려져 있었다차 안은 난방이 되고 있고 누군가가 씹는 껌의 인공적인 체리 향이 감돈다.
버스는 쉼 없이 달리고가만 보니 레이나는 잠이 들어 있었다이츠카는 배낭 주머니에서 아이팟 이어폰을 꺼내 양쪽 귀에 꽂는다호세 곤잘레스의 노래를 들으며 변함없는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