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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떠난 뒤 맑음>

08. 바라는 게 없으면 실망할 일도 없을 텐데

by BOOKCAST 2022.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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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는 맛있었다. 가이드북에 보스턴 명물로 추천되어 있던 클램 차우더는 이츠카 입에는 너무 짰지만. 멀리 오클라호마에서 왔다는 세 사람은 퍼거스와 마크가 대학생으로 열아홉 살, 리비가 생협에 근무(본인 왈,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 대학에는 가지 않았단다)하며 스물한 살이었는데 그 나이치고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바보스러운 짓들을  먹다 말고 갑자기 기성을 지르는가 하면 서로 팔꿈치로 상대방을 쿡쿡 찌른다든지, 누군가의 접시에 놓인 감자를(자기 몫도 아직 남아 있으면서) 잽싸게 빼앗아 먹는다든지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쁜 아이들은 아닌 듯 보였다. 작년 여름에도 이곳에 고래를 보러 왔다는데 예의 고래 관광선에 관해서도 상세히 알려 주었다. 특히 리비의 남동생인 마크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배 위는 추우니까 겉옷이 필요하다느니, 파도가 거칠 때도 있으니 멀미약을 미리 먹어 두는 게 좋다느니, 영어가 많이 서툰 이츠카를 위해 손짓 발짓 섞어 가며 조언해 주었다. 선착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지도에 표시해 주었으니 이츠카로서는 더 이상 그들에게 볼일은 없었고 얼른 호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레이나가 지금 퍼거스의 질문 공세를 받고 있는 참이다. 어떻게 그리 영어를 잘하는지, 햄버거를 일본어로 뭐라 하는지, 언제까지 미국에 있을 건지, 오늘은 어디를 구경했는지.
안 먹어?”
불쑥 리비가 물었다. 이츠카 몫의 접시에는 햄버거가 4분의 1쯤 남아 있다.
이제 배불러.”
손을 위에 갖다 대는 제스처를 써 가며 대답했지만 리비는 납득하지 못하고, 이제 한입 남았으니 힘내서 마저 먹어 버리라는 듯한 말을 (아마도) 하고는 몇 가지 설명까지 덧붙였다. 여기는 유기농 재료만 사용한다느니 체인점과는 달리 로컬 푸드를 지향하는 가게라느니. 그건 알겠는데 더 이상은 못 먹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기대에 찬 눈빛으로 지켜보는 리비에게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어서 이츠카는 일단 내려놓은 포크와 나이프를 다시 집어 들었다. 자신은 이런 면이 우유부단해서 탈이라고 생각한다.
굿(Good).”
리비가 기뻐하는 듯한 소리를 낸다.
굿(Good).”
마크도 말하고, 퍼거스도 말하고, 레이나까지 생글거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가만 보니, 레이나 몫의 접시에도 햄버거가 남아 있었는데 아직 어린아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세 사람 다 거기에 대해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튿날, 선착장에서 재회한 세 사람은 눈 덮인 산에라도 오르는 양 두터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맑고 따뜻한 가을날이어서 해안가를 산책하는 사람들 중에는 반소매 티셔츠 차림도 있다는데, 이츠카는 코트를, 레이나는 다운재킷을 입고 있었지만 리비와 마크, 퍼거스는 입을 모아  몸짓까지 섞어 가며  그러고 가면 얼어 죽는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승객들도 꽤나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매점에서 팔던  이츠카 눈에는 디자인이 (No)  롱패딩(가슴에 고래 자수 패치가 달린)을 두 벌 구입한다.
이것도 사는 게 좋지 않을까?”
레이나가 가리킨 것은 쌍안경이었는데 마크가 그건 필요 없다면서 먼 곳이 보고 싶을 땐 자기 것을 빌려주겠다고 해서 사지 않았다.
이츠카짱, 와 봐. 바다 냄새가 나.”
햇살이 눈 부신 산책로를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다. 승객은 가족 단위와 노인 그룹이 많은 듯하다.
파랗네, 바다.”
레이나가 넋을 잃고 말한다. 수면은 확실히 파랗고, 평온하고, 반사되는 빛으로 온통 반짝거렸다.
고래, 있을까.”
중얼거린 레이나의 옆얼굴. 뺨이 하얗고 통통하다. 이츠카는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 만약 고래를 보지 못한다면 레이나는 얼마나 실망할까. 이츠카는 레이나가 실망하는 게 싫었다. 누군가가 실망한다는 사태가 옛날부터 싫었다.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자신처럼 바람이라는 것이 없으면 실망할 일도 없을 텐데, 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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