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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떠난 뒤 맑음>

02. 이츠카가 가장 자주 쓰는 영어 단어는 ‘No’다.

by BOOKCAST 2022.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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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완전히 어두워져 버렸다.
고급 델리카트슨의 창가 카운터 석에 레이나와 나란히 앉아 이츠카는 지금 김초밥을 먹고 있다. 냉장 케이스에 진열되어 있던 그것은 선득하면서 청결한 맛이 났다.
우선 표를 사야 해.”
델리카트슨 바로 앞이 버스 발착지인 포트 오소리티 터미널이다. 가이드북에는 당일에도 표를 구매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만석일 때도 있다기에 급한 여행은 아니라 해도 만일을 위해 우선 사 두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소심하게 느껴졌다. 무계획적인 여행을 하자고 마음먹었으면서.
맛있다.”
새 모자를 쓰고 신이 난 레이나가 말했다. 호텔 옆 부티크에서 방금 전에 산 그 수수한 니트 모자(모스그린과 카키색이 섞인)는 하얀 피부에 인형같이 어려 보이는 얼굴의 레이나에게 잘 어울린다.
여기 오이는 색깔도 그렇고, 풍미가 허니듀 멜론 같네.”
오이 김초밥을 하나 집어 들며 이츠카가 말하자,
그게 오이 아냐?”
하고 레이나는 재미있는 듯이 대답했다. 가출이나 다름없이 집을 나왔는데도 전혀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이츠카는 물론 불안했다. 지금쯤 고모 부부는 틀림없이 걱정하고 있겠지).
일본 오이는 맛도 색도 좀 더 진하지.”
아츠카는 그렇게 말하고 뜯지 않은 작은 간장 봉지  여분으로 받아온 것   살며시 집어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그랬나?”
레이나는 일본 오이에 관한 기억을 아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포트 오소리티 터미널에는 밤에도 사람이 많았다. 건물 안은 형광등이 훤하게 밝고 번잡스럽다. 너나 할 것 없이 걸음을 서두르는 탓인지, 큼직한 수하물마다 생활감이 묻어 있는 탓인지 이츠카는 어쩐지 압도당하고 만다. 미국에는 유색 인종이 많구나  물론 나도 그중 하나이지만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이쪽.”
레이나가 앞장서서 안내 표시를 도우미 삼아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간다. 매표소는 지하에 있는 모양이다.
미국 유학은 고등학교를 중퇴해 버린 딸을 위해 부모님이 마련해 준 대안이었지 이츠카 스스로 원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일본에 있고 싶었던 건 아니고, 미국 외에 달리 가고 싶은 곳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요컨대 이츠카에게는 바람이라는 것이 없었다. 바라지 않는 것만 잔뜩 있다. 자신이 무얼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건 몰라도 싫은 것만큼은 확실히 안다(그렇다 보니 이츠카가 가장 자주 쓰는 영어 단어가 ‘No()).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이츠카에게 ‘No’였던 것은 이를테면 학교이고, 연애이고, 여자아이들이었다. 살찌는 것도, 친구와 수다 떠는 것도, 글짓기며 일기 쓰기도 ‘No’였고, 친구네 집에 가서 자는 것도, 친구가 집에 놀러 와서 자는 것도, 록 콘서트장에서 다 같이 열광하는 것도 ‘No’였다. 긴 전화 통화도, 즉각적인 답신이 의무와도 같은 모바일 메신저도, 담배도, 화장도, 사진 찍히는 것도, 억지웃음을 짓는 것도, 그런 웃음을 보는 것도 전부 ‘No’였다. 헤아리자면 한도 끝도 없는 그 ‘No’ 속을 이츠카는 간신히 살아남아 왔다. 그것은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기에 열일곱 살이 어리다는 건 알지만 이츠카는 가끔 자신이 노인 같다고 느꼈다.
표는 바로 살 수 있었다. 창구에서 담당 직원과 묻고 답할 필요도 없이 발매기에서 간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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