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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클라우드 국가가 온다>

10. 신공화주의: 분열의 시대, 공존의 처방 (마지막 회)

by BOOKCAST 2022.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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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와 신자유주의그 대안으로서 신공화주의
국민이 자신의 손으로 뽑은 정부와 국회를 믿지 못하는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요? 아무도 나의 이익을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뿌리 깊은 불신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21세기에 들어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화된 양극화가 이 불신과 분열의 원인 중 하나라는 데 동의할 것입니다.
 
경제와 정치의 양극화라는 괴물이 한국 사회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98년 IMF 위기였습니다. IMF는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한국 사회에 면면히 이어오던 공동체 정신을 말살했지요. IMF가 제시한 신자유주의는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양극화와 분열의 괴물을 양산했는데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그 실체를 완연히 드러내었고 그동안 축적되었던 전 세계인의 공분을 폭발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공분은 ‘인간을 위한 자유, 공존을 위한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는데요. 1990년대 후반, 이 갈망을 해소할 새로운 자유를 선언하는 일련의 철학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새로운 철학은 ‘공동체와 자유’라는, 서로 어울리기 힘든 두 개념을 결합했습니다. 이 철학을 그들은 ‘신공화주의’라고 불렀고 이를 대표하는 철학자는 필립 페팃입니다.

 
공화주의의 핵심은 공공 이익공동선신공화주의는 비지배 자유
신공화주의에 앞서 먼저 공화주의에 대해 알아볼까요? 로마 철학자 키케로(BC 106~43)가 처음 사용한 ‘공화(res publica)’는 본래 그리스 아테네의 ‘폴리스(polis)’, 즉 ‘도시국가’를 로마어로 번역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공공의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국가는 모두의 것’이라는 의미이지요. 국가는 모두의 것이기에 모두의 이익, 즉 공공선을 위해서 모두의 동의를 얻어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화주의 핵심 가치입니다.
 
공화주의가 지향하는 이상적 인간은 당연히 그 핵심 가치인 공공선,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실현하는 인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정치 참여야말로 인간으로 태어나서 추구해야 할 ‘좋은 삶’, 즉 ‘아레테(arete)’라고 주장했지요. 마키아벨리는 그리스어 아레테의 로마어 버전인 ‘덕(virtu)’을 갖춘 시민이 바로 로마 공화국의 안정과 번영의 원동력이라고 말했습니다. 20세기 공화주의자, 한나 아렌트는 공익의 영역에 참여할 때 비로소 인간이 인간일 수 있으며 이러한 인간을, 사익을 추구하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에 대비해 ‘시민적 인간(homo civicus)'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렇듯 그리스와 로마에 뿌리를 둔 공화주의는 그 무엇보다 공동체를 위한 덕성을 갖춘 시민을 중요시했는데요.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20세기 필립 페팃의 신공화주의가 갈라져 나옵니다.
 
20세기의 신공화주의는 시민의 덕성보다는 시민과 시민 간의 관계를 중요시합니다. 이 관계의 핵심 개념이 ‘누구도 타인의 자의에 의해서 행동의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비지배 자유(freedom as non-domination)'입니다. 이 새로운 자유 개념의 기본 전제는 ‘사익’이 아니라 ‘공익’을 실현하려는 적극적 자유입니다. 비지배 자유는 자율성과 공공성의 결합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요. 비지배 자유는 합리적 이기주의, 즉 사익을 전제로 하는 애덤 스미스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자유와도 다릅니다.
 
공화주의 국가의 시민이 누구의 지배를 받지 않고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은 정치 체제가 필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들에게는 주요한 정치적 지위와 권한을, 평민들에게는 기초적인 공민권을 주는 귀족정과 민주정의 혼합정체를 제안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은 그리스에서는 실현되지 못했는데, 폴리비우스는 이것이 바로 로마에서 실현되었다고 봅니다. 로마는 콘솔(consol)이라 부르는 두 명의 집정관,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로마의 권위를 대변하는 원로원(senatus), 나머지 로마 시민 전체가 모인 민회(comitia)로 구성되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폴리비우스를 이어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고 패망할 수밖에 없다는 공화주의적 혼합정의 원리를 16세기 유럽 정치사에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근현대에 들어와서도 로크의 2권 분립, 몽테스키외의 3권 분립, 귀족 중심의 상원과 시민 대표의 하원으로 양분된 양원제 제도 등을 통해 프랑스의 근대화를 이루어냈고, 오늘날 정부통령제, 양원제 등의 권력 분립을 통해 미국의 세계 패권 근간이 되었지요.

 
공화주의의 물적 토대-경제적 자율
비지배적 자유를 기반으로 시민이 다른 계급과 동등한 관계에서 공익 실현에 참여하려면 적어도 생계형 인생에서는 벗어나야 합니다. 개인이 각자의 생존을 위해 경제활동에만 몰입하면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공적인 세계에 무관심하게 되고 이는 곧 정치의 실종, 결국 공화주의의 실패로 끝난다는 것이지요. 영미권의 대표적인 공화주의자 제임스 해링턴은 농지법으로 구현되는 재산 균등의 원리가 로마 공화국의 기초였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의 공화주의를 건설한 토머스 제퍼슨에게도 자유농민의 자치를 위한 기초적인 물적 토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생계를 전적으로 의탁해야 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화주의의 근간이 흔들렸습니다. 특히 20세기에 전 세계를 강타한 신자유주의 논리는 시민적 평등을 위한 물적 기반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지요. 사회적 양극화와 정치적 대립이 화해 불가능한 분열을 일으켜 인간 사회의 지속불가능성이라는 위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역으로 21세기에 공화주의가 필립 페팃, 존 롤스 등의 석학들을 통해 전 세계에서 부활하는 이유가 되지요.
 
페팃은 비지배 자유를 누리려면 ‘개인적 자립’이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그는 이를 위해 ‘합리적인 국가소득(reasonable state income)’을 제안했습니다. 우리에게 《정의론》으로 잘 알려진 존 롤스는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재산 소유제 민주주의’를 제안합니다. 사회의 최소 수혜자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의 한계, 천부적 재능의 한계, 기타 삶에서 겪게 되는 불운의 한계를 모두 완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전 세계에 확산되는 디지털은 새로운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 방식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과거 자본주의에 의해 사라졌던 시민의 경제적 자율성을 회복할 물적 토대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기업에 종속되지 않는 1인 기업가, 대기업 중심의 경제 생태계에 대항할 수 있는 조합형 플랫폼 등은 21세기 클라우드형 공화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물적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희망적인 것은 한국이 클라우드 공화국을 선도할 수 있는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디지털 혁신 국가인 동시에 역사 속에 깊숙이 천착된 공화주의의 전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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