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NS상에서 ‘빌런’의 쓰임새는 당연히 훨씬 더 다양하고 빈도도 높다. 마스크 빌런, 독서실 빌런, 술집 빌런, 오피스 빌런, 골목 빌런, 플렉스 빌런, 섹시 빌런, 개그 빌런, 치킨 빌런, 갬성 빌런, 커피 빌런, 냉면 빌런, 얼죽아 빌런, 얼죽코 빌런, 카페 빌런 등등이다. 이 세상 그 어떤 말도 ‘빌런’으로 꾸밀 수 없는 말이 없는 듯하다. ‘빌런’을 뒤에 갖다 붙이기만 하면 그 순간 바로 ‘빌런 어족(語族)’이 된다.

‘빌런’의 의미는 상반되면서도 또 어딘가 서로 뜻이 통하기도 하는 두 가지와 둘 사이의 경계선상 의미, 셋으로 나뉜다. 먼저, 영어 ‘빌런(villain)’의 원래 뜻인 ‘악당’ 의미 그대로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 차원의, 평범한 것과는 좀 다른 ‘괴짜’의 의미다. 그리고 둘 사이 경계선상에, 악당은 악당이되 치명적 매력을 지닌 ‘미워할 수 없는 악당’ 정도의 제3의 의미가 있다.
원래 ‘빌런’은 라틴어 ‘빌라누스(villanus)’에서 나온 말이다. ‘빌라누스’는 고대 로마의 ‘빌라(villa)’에서 일하는 농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빌라누스들이 귀족과 상인들의 차별과 빈곤에 시달리다 못해 이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빌라누스’는 ‘악당’을 나타내는 의미로 바뀌게 되었다.

고대 로마의 자유 시민들은 도시생활과 전원생활 양쪽 모두를 즐겼다. 호사스럽냐 소박하냐의 차이가 있을 뿐 로마 시민 대부분이 전원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바로 ‘빌라’였다. 그런데 당시 최고 기득권층인 원로원 의원들은 농장 경영 이외 다른 경제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때 정치에 바쁜 원로원 의원들을 대신해 빌라 농장의 경영과 노동을 담당했던 이들이 바로 노예들이었다.
노예 하면 사람들은 흔히 17세기 이후 아메리카 대륙의 플랜테이션 노예들을 머리에 떠올린다. 그러나 고대 로마 시대 노예들의 역할이나 대우는 이들과 크게 달랐다. 의사, 장인, 예능인, 교사, 농장 관리, 가사 노동 등 고대 로마 사회의 직접적인 생산활동을 담당했던 이들이 바로 이 노예계급이었다. 오늘날 일반 직장인의 역할과 별 차이가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일신에 대한 자유가 없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는 정도였다. 추수감사절 격인 사투르날리아 제사 때는 노예들도 주인과 나란히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을 권리가 주어졌고, 해방 노예라는 제도가 있어 돈을 모아 자유를 사 일반 시민으로 신분을 전환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영화 <스파르타쿠스>를 통해 우리에게 각인된 그런 대규모 노예반란은 사실 매우 드물었다. 대규모 노예반란은 BC 73년의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있기 전, BC 135년과 BC 104년에 있었던 농민 반란 두 차례 정도였다. 두 차례 모두 로마의 주요 식량 공급처였던 시칠리아의 대규모 농장에서 발생했다. 같은 노예라 할지라도 전문지식을 활용하는 의사나 교사 등에 비해 농장 노동이 훨씬 힘들었으리라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농장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농노를 일컫던 고유명사 ‘빌라누스’가 ‘악당’이라는 의미의 ‘빌라누스’로 바뀌게 된 계기는 아마 이 무렵 즈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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