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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아무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

01. 희망 없이 털썩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by BOOKCAST 2022.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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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미국 아멜리아섬의 리츠칼튼 호텔 VIP층 라운지에서는 아침 일곱 시가 되면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음악을 튼 사람은 항상 나였다. 나는 거의 매일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 빠르게 출근 준비를 하고 45분을 뚜벅뚜벅 걸어 호텔에 여섯 시 전에 도착했다. 바로 라운지 오픈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일곱 시 시계 종이 울리면 바흐 음악을 틀면서 라운지의 문을 열었다.
 
그 호텔을 떠난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나는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이어폰에서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일부러 피하고 듣지 않았었다. 일어나기 싫었던 새벽, 곧 마주칠 손님들, 영어를 잘 못해 늘 가슴 졸이던 나의 일상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그 음악이 싫지 않았다.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며 내 마음에 애틋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나는 미국과 호주의 리츠칼튼 호텔과 포시즌스 호텔 뉴욕 지점을 거쳐 뉴욕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의 셰프들인 조엘 로부숑, 다니엘 불뤼, 에릭 리페르와 함께 레스토랑 매니저와 연회부 디렉터 그리고 경영보좌관으로 20년 가까이 일했다. TV와 영화에서 보는 세계적인 스타들도 많이 만나 보았다. 유명 인사들을 처음 볼 때는 가슴이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소위 진상 손님들도 적지 않게 경험했다. 그런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면 호텔리어는 다시는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직업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 직업에 회의를 느껴 호텔을 잠시 떠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내일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해 준 손님들 덕분에 다시 돌아왔다. 그 후로 나는 지금껏 쉼 없이 열심히 달렸다.
 
얼핏 들으면 이런 이력이 행운의 연속 같겠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빛나는 20% 뒤에 가려진 80%는 고군분투하며 버텨 낸 녹록하지 않은 날들이었다. 사실 나는 남들과 비교해서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다. 심지어 제일 못한 과목이 영어였고 내 입맛은 토박이 한국식이어서 양식을 좋아하지 않고 술도 마시지 못한다. 어느 모로 보나 자격 미달인 내가 어떻게 미국에서 대학원을 나오고 최고급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일할 수 있었을까? 영어가 능숙하지 못해 늘 가슴을 졸이며 일을 했고, 프랑스 음식을 몰라서 하루 다섯 끼를 먹으며 공부했으며 뉴욕 상류층의 라이프 스타일을 전혀 가늠하지 못해서 매일 초과 근무를 하며 감각을 배우고자 하는 등 웃픈 드라마를 써 내려왔다.
 
20년 가까이 지속한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왜 한국에 다시 오셨어요? 미국이 더 좋지 않나요?” 나는 세계 최고의 대가들과 가까이 일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미국인이나 프랑스인이라고 해도 경험하기 쉽지 않은 나의 경력은 역설적으로 내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서, 배경으로 가진 것이 없어서, 또 인생이 화장지처럼 술술 풀리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나는 성공의 경험을 자랑하고 싶지 않다. 내가 간 길이 옳았기 때문에 내가 살아온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대신 내가 한 선택에 책임을 지려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당신도 남들이 보기에는 아이 같아 보이는 선택을 용감하게 하기를, 또 그 선택을 어른처럼 책임지기를 바라니까. 우리들이 쉽게 말하는 ‘할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유들’로 바꾸어 가는 얘기를 전하고 싶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니까. 언젠가 희망 없이 털썩 주저앉아 있을 때 내 이야기를 떠올리며 의지와 희망으로 툭툭 털고 일어난다면 이 책은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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