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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아무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

04. 비자 발급을 거부당하다.

by BOOKCAST 2022.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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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혹시 미국의 리츠칼튼에서 근무해 보고 싶지 않아요?”
 
미국 본사 리츠칼튼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당연히 근무해 보고 싶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돈도 벌고 영어도 배울 수 있는 기회 아닌가! 그러나 가고 싶다고 무조건 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엄마의 반대가 극심했다. 9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서 미국의 이미지는 상당히 험악했다. 보수적인 엄마의 시선에서 미국은 마약과 총기가 난무하는 무법천지의 나라였다. 엄마는 단 한 푼도 도와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나는 독일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과 리츠칼튼 서울에서 받은 첫 월급을 모아 비행기 표를 샀다. 엄마는 내가 공항에 나가는 날까지 화를 내며 나와 보지도 않았다.
 
또 다른 장애물은 비자였다. 지금 젊은 세대에겐 믿기 힘들겠지만 1989년 전까지만 해도 관광 목적의 출국은 어려웠다. 순수한 여행 목적으로 여권을 발급받기는 매우 힘들었다. 1989 1 1일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후 여행객들은 물밀 듯이 해외로 빠져나갔고 이때 미국에는 불법 이민자도 많이 생겨났다 한다.
 
상황이 이러니 미국은 비자 발급도 엄격해서 미혼 여성, 젊은 남성, 직업이 불분명한 사람 등 미국 내 불법 체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비자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나는 비자 발급을 받을 수 없을 요건을 다 갖추었다. 23세 미혼 여성이고 특기생도 아니고 미국에서 드문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니 결국 미국 대사관은 내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여권 맨 뒤에 날짜와 함께 빨간색으로 ‘Reject(거부)가 찍혔다. 이대로 미국 근무는 물거품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리츠칼튼 본사가 내 신원을 보증하고 나섰다. 서울 주재 미 대사관에 직접 팩스와 전화로 나의 채용 의사를 밝히고 18개월 후 나를 한국이나 아시아, 유럽 등 미국 이외의 지역으로 파견 보낼 것이라고 약속했다. ‘수습사원이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재라는 게 이유였다.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에 마침내 비자 승인이 났다.
 
드디어 리츠칼튼으로 떠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갖춰졌다. 나를 어느 지점으로 보낼까 여러 의견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플로리다에 있는 리츠칼튼 아멜리아 아일랜드로 결정이 났다. 리츠칼튼 서울에서 우리 팀을 교육했던 부총지배인이 일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리츠칼튼 아멜리아 아일랜드에서 VIP 클럽 컨시어지 매니저인 수잔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를 한번 교육해 보겠다고 이야기를 한 것도 결정에 한몫했다. 여러 사람에게 맞춤형 도움을 주는 내 성향이 VIP 담당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멜리아섬은 미국의 부유한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는 플로리다에 있는 휴양 도시다. 나는 비행기 표와 비자 수속비용을 지불하고 남은 돈인 400달러를 들고 아멜리아섬에 있는 리츠칼튼으로 떠났다. 호텔에서 일해 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빠르게 세계적인 호텔에서 일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미국 본사가 비자 문제를 직접 해결할 정도로 애를 써서 나를 보낸 것이 아닌가.
 
내가 그냥 스쳐만 갈 호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들이라 치부하고 해외 직원들을 돕지 않았더라면 본사에서도 호텔 직원으로서의 나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일은 업무 범위에 적혀 있지 않으니까 할 수 없어요’, ‘그게 제 일인가요?’, ‘그거 하면 추가 급여 나오나요?’ 받은 만큼만 일하는 건 노동자에게는 당연한 일일 수 있다. 물론 그런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열정을 강요하며 급여는 적게 지불하는 문화도 있고, 정직원 전환을 미끼로 가혹하게 착취하는 기업도 자주 봤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몸을 사리는 게 무리는 아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계산만으로 정확히 측정되지 않는 것 같다. ‘뭐 하러 그런 일까지 해?’라는 말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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