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츠칼튼 본사에 채용되는 놀라운 행운을 누리게 되었지만 나는 영어에 자신이 없었다. 생활 영어도 완벽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전문적인 단어가 섞이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영어가 내 발목을 잡은 게 이번에 처음은 아니었다.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학창 시절 내내 가장 못한 과목은 영어였다.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상대해야 하는 호텔 직원이라면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특히 리츠칼튼 같은 일급 호텔은 적지 않은 돈을 내고 투숙하는 손님들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손짓 발짓을 해 가며 스태프에게 이해시키는 수고를 하기 원치 않는다. 그러니 영어 때문에 곤혹스러운 나는 매 순간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그랬음에도 결국 VIP 손님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영어 단어를 알아듣지 못해 손님을 머리끝까지 화가 나게 만든 것이다. VIP 라운지에서 한 손님이 내게 다가왔다.
“스테이셔너리(Stationery)를 주실 수 있나요?”
Stationery는 사무용품을 뜻하는 단어다. 그 단어를 몰랐던 나는 ‘Station Area(역 주변)’로 들렸다. 아멜리아는 섬이기 때문에 지하철도 없고 기차도 없다. 나는 친절하게 그에게 답했다.
“손님, 아멜리아섬에는 역(Station)이 없습니다.”
그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아뇨, 스테이셔너리가 필요해요.”
역이 없다는데 자꾸 왜 이러지? 나는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 지도를 펼쳤다.
“여기 지도를 보세요. 섬에는 역이 없습니다. 손님.”
다정하게 웃는 내 얼굴을 보면서 그는 “No!”를 외쳤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그는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매니저 불러 주세요!”
VIP 손님이 화를 내며 매니저를 요청하다니, 이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대박 컴플레인’이 걸린 것이다. 매니저에 총지배인까지 출동해 그에게 거듭 사과를 했다. 그가 원한 건 종이와 펜이 담긴 문구 키트였는데 내가 지도까지 펼쳐 가며 역이 없다고 설명을 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뒤에서 황망하게 서 있는 나에게 총지배인이 물었다.
“줄리아, 정말 스테이셔너리를 못 알아들었어요?”
그런 단어는 사전에서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바로 찾을 수 있던 때도 아니었다. 사전이 옆에 있었어도 나는 스테이션(Station)을 찾았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들렸기 때문이다.
“네, 죄송합니다.”
총지배인은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전까지 그는 나를 적극 지지해 주던 사람이었다. 그가 느꼈을 실망 때문에 가슴이 벌렁거렸다. 이제 호텔에서 해고되는 일만 남았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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