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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아무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

02. 피아노 한번 쳐 보지 그래요?

by BOOKCAST 2022.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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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해 보이는 내 커리어는 내 상상 밖에서 시작되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호텔에서 말이다.
“피아노 한번 쳐 보지 그래요?”
 
내게 그렇게 물은 건 피에르가르뎅 유럽 담당 영업본부장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고모 댁에 머무르며 어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어학원에 다니면서 고모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도왔다. 숙식을 제공하는 고모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서였다.
 
어느 날 피에르가르뎅 유럽 담당 영업본부장이 고모 가게에 찾아왔다. 신제품 소개도 하고 판매 추이도 얘기하는 정기 방문이었다. 고모는 나를 데리고 그와 함께 시내에서 가장 유서 깊은 슈타이겐베르거 프랑크푸르트 호프 호텔에 차를 마시러 갔다. 차를 마시다가 프랑스인 영업본부장이 내게 물었다.
 
“주현 씨는 취미가 뭐죠?”
“저는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해요.”
“그래요? 그럼 한번 들려줄 수 있나요?”
 
평온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중에 그는 불쑥 호텔 로비 중앙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를 가리켰다. 취미가 피아노라면 한번 칠 수 있겠냐는 제안이었다. 내가 이렇게 좋은 호텔 로비에서 피아노를 친다고? 그럴 수 있을 리가. 나는 손사래를 치며 설명을 했다.
 
“이렇게 좋은 호텔은 피아노를 잠가 두곤 해요. 아무나 치면 소음이 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저는 피아노 전공자도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 칠 만한 실력은 안 된답니다.”
“그냥 한번 들어 보고 싶어서 그래요.”
 
내가 정중히 거절했음에도 그는 로비 라운지 매니저를 불러 피아노를 쳐도 되겠느냐고 부탁했다. 그리고 호텔 측에서 선뜻 내게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마지못해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스타인웨이였다. 속으로 오 마이 갓! 소리가 절로 나왔다. 손가락만 슬쩍 대도 청명한 소리가 날 만큼 길이 잘 들여진 최고급 피아노였다. 피아노에 버터를 발라 놓았나 할 정도였다. 나는 고급 피아노 덕에 40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 마음대로 연주를 했다. 한때 연주자를 꿈꾸었으나 비싼 레슨비의 부담으로 전공을 포기했던 피아노다.
 
나는 악보를 보고 치기보단 들은 대로 피아노를 두드렸다. 흉내를 내 보는 것이다. 클래식 곡도 연주하고 동요도 연주했다. 피아니스트 흉내 수준이었지만 로비에 있던 손님들은 크게 박수를 쳐 줬다. 어쩌면 악보도 없이 열심히 치는 독특한 모습이 호감이었을 수도 있다. 비록 내가 피아노를 굉장히 잘 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유서 깊은 호텔 로비에서 한참 동안 피아노를 연주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또 생겨났다. 로비 라운지 매니저가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로비 피아니스트로 일해 줄 수 있겠어요? 호텔 총지배인이 당신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먼저 제안을 하셨습니다.”
? 저요? 이 실력으로요?”
총지배인이 손님들의 박수 소리에 놀라시며 바로 채용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두 번째 오 마이 갓!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이 기회를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이죠! 하고 싶어요!”
 
나는 그 호텔의 피아니스트로 일하게 됐다. 나를 중국인으로 오해하는 손님들이 많아 엄마에게 부탁해 국제 우편으로 한복을 받아 입고 연주를 했다.
 
피아노 전공자도 아니고, 독일에 유학을 간 유학생 신분도 아니었지만 이 작은 기회가 나를 평생의 직업으로 안내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호텔에서 일하게 될 내 경력은 막연한 꿈으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 아르바이트는 호텔에서 일하고 싶은 바람의 씨앗을 내 마음에 심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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