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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아무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

09. 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링 위에 오른다는 것

by BOOKCAST 202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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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 기회를 잡아 물 건너 미국에 오기는 했지만 학창 시절부터 나를 괴롭힌 영어는 여기 와서까지 나를 힘들게 했다. Stationery 사건 이후부터 뭔가 내가 맡은 일에 문제가 생기면 은연중에 내 영어 실력을 탓하는 시선을 느껴야 했다. 언어라는 게 하루아침에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어가 완벽해지기 전까진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호텔 일이 컴퓨터나 기계로 하는 일이 아니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언어로 소통하는 일이 기본이다 보니 영어를 잘 못하는 것은 무능력이면서 민폐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약점을 행동으로 보완하려 남들이 하기 꺼려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그런데 육체노동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전화 받기였다. 얼굴을 보고 말을 하면 상대의 표정이나 분위기 같은 비언어적 표현으로 눈치껏 파악할 수 있지만, 전화는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눈치가 통하지 않는다. 전화로 들리는 소리는 뭉쳐서 들리거나 음질 상태에 따라 끊겨 들리기도 해서 한국말로도 가끔 잘 알아듣기 힘들 때도 있다. 그러니 전화로 들리는 영어는 나에겐 그냥 웅얼웅얼하는 소리였다. 소리일 뿐 언어가 아니었다. 사람마다 악센트도 다르고 표현법도 다르니 더욱 어려웠다. 특히 남부 악센트가 섞인 동료들의 전화 속 영어는 이해 불가였다.

나는 3개월 동안 전화벨이 울리면 도망을 갔고 6개월이 될 때까지도 가능하면 전화 업무를 피해 다녔다. 주로 2 1조로 근무를 하니까 전화가 오면 슬쩍 자리를 피해 동료가 받도록 했다. 문제가 되는 건 동료가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언제까지고 전화를 남에게 미루며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손님들이 빠르게 쏟아 내는 말은 한 번에 알아듣는 것이 어려웠다. 항상 메모지를 두고 포인트가 되는 말을 적으며 손님에게 내가 알아들은 내용을 되물어 확인했다. 내 나름의 생존 전략이었다. 대학 은사님은 이런 나를 두고 주현이는 이빨이 없으면서 잇몸으로 더 잘 씹으며 산다.”라고 말씀하셨다.
일을 수행하는 데 적합한 능력도 기술도 없으면서 어찌어찌 해 나간다는 비유였다.


재차 되물으며 정확하게 손님의 필요를 파악하고 제공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서 직접 대면하는 손님들에게도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음식을 주문받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VIP 라운지를 활용하는 손님들은 이미 차려진 음식과 음료를 셀프 서비스로 이용하는데 특별한 칵테일이나 라운지에 없는 음식을 요청할 경우에는 여지없이 그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가령 건포도를 달라고 하는 손님에게는 혹시라도 땅콩도 달라는 말을 못 들었을까 봐 견과류까지 둘 다 같이 내갔다.

커피에 대해 뭐라고 주문을 하면 나는 아예 데운 우유, 크림, 백설탕, 황설탕, 무설탕 감미료까지 모두 제공했다. 아이들이 오면 요청하기 전에 사과주스 같은 음료와 음식을 알아서 준비했다. 손님들은 말 안 해도 풀 패키지가 나오는 나의 서비스에 매우 만족했다.

과한 것이 모자란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 항상 모든 것을 준비했다. 음식뿐만 아니라 다른 서비스도 마찬가지였다. 복사지 같은 편지지 크기의 종이를 원하면 엽서 크기의 메모 카드도 같이 드렸다. 항상 하나 더 서비스가 나의 대응 방안이었다. 근무 시간 내내 항상 준비, 대기의 상태에 있었다.

그 때문인지 입사 후 6개월 만에 영어가 부족한 내가 VIP층 부매니저가 되었다. 이런 빠른 승진은 호텔에서 처음이었다. 리츠칼튼의 정신인 손님이 말하기 전에 미리 서비스하기가 내 노력과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언어가 아니라 순전히 감각으로, 눈치로 업무를 봐야 했기에 그 피로는 배가 됐지만 사람을 살피는 기술은 몇 배 더 증가했다.

영어 실력만 봤더라면 내가 부매니저가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질 거라는 걸 안다고 해서 링 위에 오르지 않는 복서는 없겠지. 중요한 건 링 위에 오르는 거니까. 질 것 같을 때, 세상이 너무 커 보이기만 할 때, 당신도 이런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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