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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아무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

10. 줄리아가 없는 호텔은 가고 싶지 않아요. (마지막 회)

by BOOKCAST 2022.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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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칼튼 호텔의 손님들은 부지런히 고객 카드를 썼다. 좋은 점, 나쁜 점, 개선할 점, 보완할 점 등 가감 없이 의견을 냈고 직원들에 대한 평가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고객 카드를 가장 많이 받은 ‘고객 카드 퀸’이었다. 8세 어린이부터 나이 많은 단골손님까지 많은 손님들이 카드와 편지를 주었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호텔업에 회의가 들 때마다 나는 이 카드와 편지들을 꺼내 보았다. 자리에 앉아 상자 속에 담긴 카드들을 하나씩 읽고 나면 다시 일하러 갈 에너지가 생겼다.
 


친절하고 교양 있는 손님들도 많지만 호텔은 뭐든 다 해 주어야 한다는 진상 손님, 까칠하고 불평불만에 요구사항 많은 손님들을 대할 때면 ‘이 일을 왜 하나, 그만둬야지’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었다. 육체적으로 하루 종일 서 있는 것도 힘들었지만 감정적 노동 탓에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했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하다 보니 신경 쇠약에 걸릴 만큼 피로가 누적되었다. 정갈한 모습에 잘 다려진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손님 눈에는 근사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다른 사람이 자고 난 자리를 치우고 남들이 먹던 걸 정리하는 게 호텔과 레스토랑의 기본적인 일이다. 철저한 서비스가 몸에 배어 있다 보니 일상생활에서도 내 직업병을 감출 수 없었다. 가게 상점문을 열고 닫을 때도 도어맨처럼 문을 잡고 서 있거나 어디를 가도 내가 직원처럼 주위를 치우곤 했다. 조금 병적일 정도였다.
 
결국 나는 리츠칼튼을 퇴사했다. 과감한 결정이었다. 다시는 호텔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까지 했다. 내 작은 집을 정리하고 큰고모가 계시는 시애틀로 옮겼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호텔은 그만두었지만 지인이 운영하는 동남아시아 식당인 이스트 앤 웨스트 카페에서 오후와 주말에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어느덧 3년이 흘렀다.
 
어느 날 저녁, 집안 정리를 하다가 리츠칼튼에서 손님에게 받았던 카드를 모아 둔 상자를 발견했다. 긴 시간 동안 쌓여 있었던 편지들. ‘한동안 보지 않았었지…….’ 나는 자리에 앉아 편지를 하나씩 꺼내 읽었다.
 
줄리아우리 집에 꼭 놀러 와요!
줄리아가 있어서 나의 출장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줄리아다른 곳에 가지 말아요.
줄리아가 없는 아멜리아섬은 가고 싶지 않네요그리워요줄리아.
 
감회가 밀려왔다. 스트레스를 견디며 힘든 시간을 보냈던 호텔이었지만 손님들 때문에 기쁘고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곳도 호텔이었다.
나는 주로 객실부 VIP 컨시어지 담당을 맡았던 만큼 손님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챙겨 왔다. 호텔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며 편의를 책임지는 사람들도 많지만 언제 어디서든 손님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다른 직무에 비해 손님들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며 서비스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는 손님은 친구 같았고 오랜만에 출장을 오는 손님은 멀리서 찾아온 친척 같았다. 손님들을 심정적으로 가까이 느끼면서 나는 ‘Welcome Home!(집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이라는 멘트로 손님을 맞았다. 호텔은 손님들에게 낯선 도시의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일 수 있다. 내 동네가 아닌, 내 집이 아닌, 내 가족이 없는 냉기가 흐르는 곳 말이다. 이런 곳을 친구가 있고 가족이 있는 집처럼 느끼길 바랐다. 이러한 관계가 나와 손님의 관계였다.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호텔에 대한 마음이 다시 차올랐다. 절대 다시는 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곳이 바로 내가 있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다시 돌아가도 괜찮을까? 호텔을 떠난 지 3년이 되었다. 이대로 복귀하면 손님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까? 물음표가 찍혔다. 내 손님들에게 더 나은 모습으로 복귀하고 싶었다. 나를 업그레이드해서 돌아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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