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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얄팍한 교통인문학>

04. 거친 땅에 레일을 놓다.

by BOOKCAST 2020.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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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길은 고요했다. 들판과 숲에는 인간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다. 그곳은 짐승들을 위한 길이었고, 인간에게 늘 모험을 요구했다. 그래서 순례자들이나 상인들을 제외하면 먼 거리를 이동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태어난 곳이 세상의 전부였고 각 공간은 산과 바위로 막혀 있었다. 그 단단한 벽을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레일(rail)과 그 위를 달리는 증기기관차, 즉 철도였다.

19세기부터 땅에는 레일이 깔리고 무거운 쇳덩이가 굉음을 내며 도시와 도시 사이를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철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의 도로는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고대 로마제국은 전 유럽에 도로망을 구축했으나 로마 멸망 이후 중세로 접어들면서 이 길들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중세 봉건사회에서 도로 건설은 그 누구의 관심사도 아니었다.

길이 없으니 교통수단도 큰 발전이 없었다. 사륜마차가 17세기 무렵 등장했지만 크게 대중화되지는 못했다.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길은 마차가 다니기에 너무 좁았고, 비라도 내리면 도랑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이처럼 열악한 도로가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가로막던 상황에서 철도는 모든 경계를 단숨에 가로지르는 혁신적인 길이었다.



인류 최초의 레일을 찾아서


증기기관차는 19세기에 개발되었지만 사실 레일은 그보다 훨씬 앞서 활용되었다. 연구자들은 레일 시스템의 출발점을 고대 이집트에서 찾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집트의 왕들은 피라미드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지었고, 이를 위해서는 큰 돌을 건설 현장까지 옮겨야 했다. 이집트인들은 먼저 나일강에 뗏목을 띄워 돌을 날랐고, 강에서 건설 현장까지는 나무로 만든 썰매를 이용했다. 이때 썰매가 잘 움직이도록 나일강의 진흙을 썰매가 다니는 길에 발랐다. 바닥과 썰매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윤활유를 바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땅을 잘 다져놓아도 엄청난 돌의 무게가 썰매를 짓눌렀다. 그리고 진흙 길은 자연스럽게 음각 형태의 레일이 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레일은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 코린토스 해협에 설치된 것이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수레가 효율적으로 다닐 수 있도록 길 위에 홈을 파냈고, 이 특별한 길은 배를 옮기는 데 사용되었다. 아테네 항구를 출발한 선박들이 서쪽으로 가려면 지중해를 크게 돌아야 했다. 만약 코린토스 해협에 막혀 있는 약 6㎞의 육지를 통과할 수 있다면 항로를 크게 단축시킬 수 있었다. 오늘날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면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을 가로지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 6㎞의 운하를 건설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코린토스 해협에 단단한 석회암으로 선로를 깔고, 그 위에 넓고 평평한 수레를 놓았다. 레일과 수레를 활용해 커다란 배를 육지 너머의 바다까지 이동시킨다는 발상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거대한 선박을 옮기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레일이 무려 600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 효과가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긴 시간이 흘러 코린토스의 운하가 19세기 후반에 비로소 건설되면서 수레는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수레가 다녔던 레일의 흔적은 아직도 코린토스 지역 곳곳에 뚜렷이 남아 있다.


광산에서 사용된 레일


레일이 본격적으로 활용된 곳은 광산이었다. 깊고 어두운 광산에서 광석을 등에 지고 옮긴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무거운 등짐을 어떻게든 내려놓고 싶다는 광부들의 욕망은 레일과 운반차라는 아이디어로 이어졌다. 광산 내부에 레일을 깔고 그 위에서 운반차를 밀면 많은 광물을 훨씬 편하게 옮길 수 있었다.

 

 

 


이러한 광산 레일은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독일의 한 대성당에는 레일과 수레의 모습을 새겨 넣은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데, 대략 1350년경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약 200년 뒤 독일의 아그리콜라(Georgius Agricola)는 『광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그는 레일과 수레를 활용해 광물을 효율적으로 나르는 방법을 소개했고, 이 아이디어는 유럽의 주요 광산에서 널리 활용되었다.

어두운 갱도 안에 나무로 된 레일을 놓은 뒤 수레로 석탄이나 광석을 옮기는 모습은 16세기 유럽에서 흔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나무는 충격과 습기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고자 18세기 무렵에는 철로 만든 레일과 바퀴가 사용되었고, 이로써 무거운 화물을 보다 빠르게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석탄과 철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레일에 운송수단을 결합한 철도는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레일 위를 달리는 마차


증기기관이 등장하기 전까지 레일 위의 탈것들은 사람이나 가축이 끌었다. 코린토스 해협에 건설된 최초의 레일에서는 수레를 움직이기 위해 100여 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었고 중세의 광산 수레 역시 사람이 직접 끌어야 했다. 가축이 들어가서 노동을 하기에 광산은 너무나 좁고 어두웠다. 따라서 광산 안에서는 사람이, 광산 바깥에서는 가축이 각각 레일 위의 수레를 맡았다. 광부들이 수레를 밀어서 광석을 입구까지 이동시키면, 이것을 다시 말이 끄는 화물마차로 옮기는 식이었다.

레일 위를 달리는 마차는 영국의 스완지-멀블스 구간에 처음 등장했다. 이 철도는 1806년 광산과 채석장에서 화물을 운반하기 위해 건설되었으나 그 이듬해부터 요금을 받고 승객도 운송하기 시작했다. 한 칸으로 된 마차는 12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었는데, 스완지의 해변을 따라 달리며 시시각각 다른 풍경을 보여준 덕분에 승객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한편 말이 끌던 마차의 흔적은 오늘날 선로 간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에서 마차는 두 마리의 말이 함께 끌었는데, 이 때문에 마차의 바퀴 폭은 말 두 마리의 엉덩이 폭과 비슷했다. 영국에서는 이를 기준으로 삼아 마차 바퀴의 폭을 1.4m로 표준화시켰다. 그리고 이 규격은 첫 대중교통용 철도인 스톡턴-달링턴 구간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오늘날 국제 표준궤 길이 1,435㎜도 여기서 비롯된 수치다. 만약 그때 말 엉덩이가 조금 더 컸다면 KTX의 좌석이 좀 더 넓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전과 안주의 경계에서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릴 때면 텅 빈 레일을 바라보게 된다. 서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선로는 멀리 지평선에서 하나가 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눈과 원근감이 만들어내는 착시다. 나란히 평행을 달리는 것들은 결코 만날 수 없다. 이를테면 사람들의 생각이나 가치관 같은 것이 그러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두 선로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에 열차는 레일 위를 안전하게 달릴 수 있다.

레일의 본질은 정해진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위에는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이 나란히 질주한다. 바로 ‘안전’과 ‘안주’라는 두 개의 바퀴다. 철도는 정해진 궤도를 달리기 때문에 빠르고 안전하지만 그로 인한 폐쇄적인 구조 역시 피할 수 없다. 레일 위에서는 앞서 가는 열차를 절대 추월할 수 없다. 그리고 늘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고 정해진 시간에 출발해야 한다. 무엇보다 열차는 레일 바깥의 길을 상상할 수 없다.

어쩌면 레일은 안주와 모험을 구분 짓는 경계선일지 모른다. 이미 깔려진 레일 위를 안전하게 달릴 것인지 거친 들판 위를 자유롭게 달릴 것인지는 각자 선택의 몫이다. 분명한 것은 어떤 삶이든 자신만의 목적지가 있다는 것이다. 평행을 달리던 레일이 지평선에서 하나가 되듯이 우리는 언젠가 각자가 꿈꾸는 곳에서 노을처럼 만나게 되리라. 그것이 비록 착시일지라도.

 

 

무거운 등짐을 어떻게든 내려놓고 싶다는 광부들의 욕망은 레일과 운반차라는 아이디어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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