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배는 효율적인 화물 운송수단이었다. 일단 물 위에 띄우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자연의 힘으로 손쉽게 짐을 운반할 수 있었다. 부력은 무거운 물건을 대신 들어주었으며, 인간은 강의 흐름이나 바람의 힘을 이용해 그것을 이동시켰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지을 수 있었던 것도 나일강에 뗏목을 띄워 큰 돌을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건조기술을 익히고 항해술을 활용하면서 선박은 가장 뛰어난 원거리 운송수단이 되었다. 동시대에 육지의 운송수단은 가축이나 수레가 전부였다. 낙타처럼 아무리 지구력이 좋은 짐승이라도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는 제한적이었고, 등에 실을 수 있는 화물에도 한계가 있었다. 반면 선박은 한꺼번에 많은 짐을 실어 나를 수 있었고, 특히 범선은 바람의 힘을 이용했기 때문에 경제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가축이나 수레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선박의 수송능력은 다양한 교통기술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트럭, 열차, 항공기 등 다양한 운송수단이 있지만 여전히 전 세계 물동량의 90%는 바다를 통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물 운송수단으로써 선박의 발전은 세계 문명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힘에서 바람의 힘으로
선박의 역사는 곧 추진 동력의 역사이다. 헨드릭 빌렘 반 룬(Hendrik Willem van Loon)은 『배 이야기: 인간은 어떻게 7대양을 항해했을까?』에서 선박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노예제’, ‘화약’, ‘증기엔진’을 언급했다.
먼저 기원전 5세기부터 그리스와 로마로 유입된 대량의 노예들이 이 시기 선박의 형태를 크게 바꾸었다. 당시 지중해에서 사용된 배는 노를 저어서 움직이는 ‘갤리선’이었다. 영화 <벤허>에 묘사된 것처럼 전쟁 중 갤리선의 추진력은 노예들의 노동에서 발생했다. 사슬에 묶인 노예들이 북소리에 맞춰 노를 저으면 그 힘으로 배가 움직였고, 침몰하면 노예들 역시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해상전술은 아군의 배를 적선의 측면에 충돌시킨 다음 병사들이 뛰어들어 백병전을 펼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상대방의 충돌을 피하고, 빠르게 돌격하기 위해서는 노를 젓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전술에 제동을 건 것은 화약과 대포였다. 화약은 지상전에서 기사 계급을 몰락시킨 것처럼 해상전에서 노를 젓는 방식에 종말을 고했다. 전투가 근접전이 아닌 대포를 이용한 원거리 사격 중심으로 바뀌면서 선박의 흐름도 대포를 많이 싣고 높은 평균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범선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범선 역시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배는 바람이 없으면 아예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항해시대에는 대서양의 무풍지대인 사르가소 해(Sargasso Sea)에서 많은 선원들이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따라서 범선으로 먼바다를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해서는 지구의 풍향과 위도·경도 등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만 했다.
항해를 위한 지식과 기술
범선을 운용하려면 전 세계의 풍향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지구에는 일정 지역 혹은 일정 위도에서 거의 일정한 방향으로 바람이 분다. 이를 탁월풍 또는 항상풍이라고 하며, 이렇게 전 지구적으로 부는 거대한 바람에 의해 해류가 발생한다. 동력수단이 돛뿐인 범선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려면 바람과 해류의 방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북반구를 탐험해 대략적인 풍향을 파악했으며, 남반구는 그와 대칭될 것이라고 추론해 지구 전체의 풍향을 재구성했다.
물론 단순히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위치와 목표지점의 방향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바로 ‘위도’와 ‘경도’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뱃사람들은 별자리를 관측해 위도를 측정하였다. 북반구에서는 북극성이, 남반구에서는 남십자성이 그 기준점이 되었다. 하지만 경도는 위도와 달리 측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경도를 알지 못하면 목표지점이 동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바다에서 표류할 가능성이 컸다.
경도를 측정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시계를 활용하는 것이다. 배가 위치한 곳의 시간과 기준 지역의 시간을 파악해서 그 시차를 지리적인 거리로 환산하면 된다. 다만 이 방법을 사용하려면 어떤 상황에서나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필요했다. 대항해시대에도 기계식 시계가 있었으나 선박에서 항해용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파도에 흔들리고 온도와 습도가 수시로 변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큰 오차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계로 경도를 측정하는 것은 목숨을 건 도박과도 같았다.
갈수록 선박 피해가 늘자 영국에서는 정확한 항해용 시계를 만드는 사람에게 거액의 포상금을 내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1737년 시계기술자 존 해리슨(John Harrison)이 수많은 실패 끝에 항해에 사용할 수 있는 정확한 시계, 크로노미터(chronometer)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런 기술 덕분에 유럽인들은 보다 먼바다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고립된 두 세계가 만나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오늘날 전 세계는 마치 하나의 문명권처럼 교류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한국에서도 유럽의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고, 미국에서 개봉하는 최신 영화를 같은 날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시대다.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이 모든 것이 근대 이전에는 꿈도 꿀 수 없던 일들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자신이 살고 있는 대륙에 고립되어 있었다. 유럽과 아메리카는 화성과 금성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누구도 대서양을 건널 수 없었다. 역사학자 주경철은 『문명과 바다』에서 “각자 독립적으로 발전하던 문명들이 서로 만나게 된 것은 인류가 먼바다를 항해할 수 있게 된 시점부터”라고 말한다. 즉 문명의 교류는 해상 교통의 발달과 함께 시작되었고, 그것을 주도한 곳은 다름 아닌 유럽이었다. 15세기 무렵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보다 빠른 신형 범선이 만들어졌고,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항해술은 보다 정교해졌다.
미지의 바닷길이 열리면서 세계사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해상 교통망을 통해 상품과 자원이 이동하고 새로운 농작물이 전파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만 자라던 토마토, 고구마, 감자, 옥수수, 고추 등은 이 시기에 유럽을 거쳐 전 세계에 씨앗을 뿌렸다. 모두가 오늘날 요리에 빠져서는 안 될 식재료들이다. 물론 긍정적인 교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닷길을 따라 매독, 홍역, 말라리아 등의 질병이 확산되었으며, 노동력 착취를 위한 노예무역이 성행하는 등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하지만 기존 문명에 다른 대륙의 새로운 문화가 합쳐지면서 세계가 크게 변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바다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탄생 과정에서 산파 역할을 한 것은 선박과 항해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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