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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너 오랫동안 이런 걸 원하고 있었구나>

03. 무서운 사람

by BOOKCAST 2022.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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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잡지 기획안을 만들어 출판사로 향했다. 미팅에 가기 전 내 기분은 떨리면서도 마치 전장에 나서는 장수처럼 비장했다. 내 기획안을 출판사 편집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총포가 날아오듯 공격이 들어와 너덜너덜해지면 그간의 노력은 수포가 되어 난 기획안을 다시 짜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 무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왜 그런 기획을 짰는지, 왜 그런 내용과 형식이 필요한지 설명할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막상 회의 현장에서는 주장을 강하게 펼칠 수 없었다. 내가 초짜인 게 티가 날까 걱정이 되었다. 나 자신도 우려하고 있는 초짜 작가라는 불안 요소를 상대에게 인지시켜 득이 될 건 하나도 없었다. 한편 내가 출판사로부터 외주 일을 맡은 기획자 ‘을’이었다는 한계도 주장을 강하게 펼치기 어려운 이유였다.

미팅은 출판사의 대리와 과장이 포진한 상태에서 격렬한 설전으로 이어졌다. 출판사에서는 충분히 좋은 내용이라는 걸 알면서도 더 좋은 것을 뽑아내려는 듯 밀어붙였다. 이럴수록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분명히 이야기를 해야 후에 낭패 보는 일이 없을 터였다. 당시 나는 초짜였지만 출판사의 대리나 과장에 비해 어린 나이가 아니었고, 아기를 낳고 키운 생활인의 저력은 그래도 있어서 일에 대한 판단은 빠르게 내렸다. 그래도 출판사 김 과장은 무리하다 싶게 계속 나를 밀어붙였다. 무자비한 압박 속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찾아서 해내야 했다.

그 당시 나는 솔직히 김 과장이 무서웠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 만난 누군가를 무서워하는 감정이라니. 이건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입도 크게 벌리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던 생물 선생님 이후 처음이었다. 어른이 되면서 누군가를 불편해하거나, 어려워한 적은 있어도 무섭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나는 모든 답이 자기 안에 있다는 듯이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출판사 김 과장을 대하는 일이 참 힘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한쪽이 밀어붙이면 다른 한쪽에는 숨 쉴 틈이 생긴다. 나와 팀을 이뤄 일해야 하는 실무 담당 편집자는 김 과장과 결이 달랐다.


나는 초등 고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를 맡았고, 각 학년별로 나와 같은 기획자와 담당 편집자가 있었다. 담당 편집자는 대리들이었고, 전체 실무를 총괄하는 팀장과 김 과장이 있었다. 김 과장은 기획이나 원고의 수정을 편집자인 대리가 다 했다며 내가 한 일을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내가 부족해서 제 몫을 못 했다는 것에 좌절하고, 따로 담당 편집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편집자의 답은 김 과장의 말과 달랐다.

“선생님이 다 하신걸요. 제가 한 그 정도의 일은 편집자가 해야 할 일이었어요. 편집자들이 그런 일 하는 건데요, 뭐. 텅 빈 백지에 글을 써나가는 작가의 일과 이미 쓰인 글을 읽고 고민하며 다듬고 고치는 편집자의 일은 다르잖아요.”

담당 편집자는 출판 과정에서 편집자의 일이 무엇인지 그런 식으로 내게 알려주었다. 우리는 꽤 호흡이 잘 맞았다. 내 의견에 편집자의 생각을 더하거나, 편집자의 생각에 내 생각을 더하는 식으로 의견을 조율해 나갔다. 담당 편집자는 몰아붙이는 김 과장의 행동들을 나중에 따로 해명하기도 했다. 어떤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했으며, 실제 요구 사항이 무엇인지 내게 설명했다.

편집자는 책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어떤 책을 만들지 작가나 기획자와 함께 고민하고, 기획안이 확정되면 이에 걸맞은 글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한다. 글에 어울리는 작가를 찾기도 하고, 작가에게 글을 의뢰하고 나서도 기획 의도에 맞게 글이 진행되도록 의견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원고가 멋진 책으로 완성될 수 있게 그림 작가, 책 디자이너 등과 함께 편집을 한다. 책의 꼴이 완성되면 독자에게 책의 장점을 어필할 방법을 찾는 일도 한다. 한마디로 편집자는 원고가 책이 되어 독자들에게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가꾸고 키우는 살림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능력 있는 편집자에 의해 발굴될 수도 있고, 성장할 수도 있다.

나의 경우도 좋은 편집자들에게 도움받은 일이 많다. 나는 편집자의 전문성을 믿고 따르는 편이다. 내게 부족한 부분을 편집자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또 그런 편집자와 일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원고를 읽고 의견을 보내오는 편집자의 문자나 메일을 연애편지처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속에 내 글이 좋다는 칭찬의 말이 있으면 글을 쓸 때 아주 힘이 났다. 그래서 어떤 편집자의 문자는 보관함에 보관해두었다가 글을 쓰며 힘이 들고, 자신감이 떨어질 때마다 꺼내 읽었다.

“그래, 난 이렇게 좋은 글을 쓸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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