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1월생이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에는 1월생, 2월생인 일곱 살짜리가 입학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의 성장 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몇 년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믿고 입학을 결정했다. 다만 아이가 또래보다 어리니 세심히 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는 몇 개월만 늦게 태어나도 앞서 태어난 아이와 성장 정도 차가 크고, 그만큼 손이 가는 일이 많다. 또래보다 아직 어린아이가 학교를 다니게 되었으니 집에 있을 때보다 신경 써야 할 일이 훨씬 많았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어떤 일이건 척척 도와주는 엄마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스케이트 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난 스케이트를 잘 타지 못한다. 걱정이 많은 성격 그대로 어릴 때부터 스케이트를 떠올리면 내가 얼음판에 넘어지고, 넘어져서 짚은 내 손위로 스케이트가 지나가는 끔찍한 장면이 상상되어 좀처럼 탈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이가 원하니 스키도 함께 배우고, 스케이트 장에도 갔다.
한번은 아이를 스케이트 장에 들여보내고 밖에서 아이가 넘어지지 않을까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아이처럼 겨우겨우 얼음판을 지치는 아이가 꽤 있어서 그 아이들을 볼 때도 나는 맘을 졸였다. 그 사이로 아주 능숙하게 스케이트를 타는 아저씨가 딸을 붙잡고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그 아이도 우리 아이처럼 스케이트는 초보 같았는데 아이의 아빠가 손을 잡아줘서 한결 안정감 있어 보였다.
‘나도 저 아저씨처럼 스케이트를 잘 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나도 내 아이를 안전하게 도와줄 수 있을 텐데.’
아들은 고맙게도 자책하고 있는 엄마를 위안해 주는 것처럼 얼마 후 얼음판에 적응하여 혼자서 곧잘 스케이트를 탔다. 불안해 보이던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 우리 아들처럼 스케이트를 타고, 이제는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이 빨리 배운다더니 정말 그렇구나 하고 있는데 다시 아저씨와 아저씨의 손을 잡은 아이가 보였다. 아저씨는 넘어지려는 딸아이를 다시 번쩍 들어 올려주었다. 넘어지려 할 때마다 들어 올려주니 아이의 발은 얼음판에 닿지 않고 살짝 떠 있는 순간이 많았다. 그 모습을 보는데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저건 아이를 진짜로 돕는 것이 아니구나!’
저 아이에게 넘어질 기회를 주었다면 지금쯤 그 아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스케이트를 혼자 탈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스케이트를 잘 타는 아저씨는 아이를 돌본다는 생각에 그 기회를 막고 있었다. 나도 저 아저씨처럼 아이를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걱정이 밀려왔다. 무엇이든 척척해주는 만능 엄마라고 내심 자부했는데 내가 아이의 성장 기회를 뺏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어 파르마콘(Pharmakon)은 ‘독’과 ‘약’이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얼마나 쓰느냐에 따라 약은 독이 될 수 있고, 독도 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이라고만 생각했던 나의 파르마콘이 아이에게 독일 수도 있었다.
사랑하는 아이가 힘들고 괴로워하는 것은 부모로서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돌아보면 나는 괴롭고 힘든 일에서 성장했다. 아이에게 성공의 경험을 줘야 한다며 잘할 수 있게 돕곤 했는데, 아이도 결국에는 제 몫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겪어야 온전히 자랄 수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사랑을 주기만 하는 것은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모는 마냥 사랑을 주며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것이 독이 될 수도 있으니, 사랑을 줄 때도 고민이 필요한 것이었다. 아, 부모 노릇은 정말 어렵다.
저 아이에게 넘어질 기회를 주었다면
지금쯤 그 아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스케이트를 혼자 탈 수 있었을 거다.
#넘어질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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