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마저
의리를 지키려고
사라졌구나
웅어는 청어목 멸칫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다. 비늘이 잘고 몸은 은백색이다. 전남 신안, 무안, 영광 등에서는 웅에· 우어, 충청도 바닷가에서는 우여 ·위여 ·우어 등으로 불린다. 강화도에서는 ‘깨나리’, 해주에서는 ‘차나리’라고도 한다. 비슷한 어류 중에 ‘싱어’가 있어 이름이 헷갈린다. 가장 생소한 이름은 ‘충어(忠魚)’다. 당나라 소정방(蘇定方, 592~667)이 백제와 싸울 때 백마강에서 웅어를 찾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물고기마저 의리를 지키려고 모두 사라졌구나”라며 웅어를 충어라고 불렀다고 한다.
웅어는 바다에 살다가 봄이면 갈대가 많은 하구로 올라와 알을 낳고 가을이면 다시 바다로 내려가 겨울을 난다. 그리고 단오 무렵 강어귀로 올라오다가 잡힌 웅어는 뼈도 연하고 고소하며 맛이 좋다. 이 시기가 지나면 뼈가 억세고 독특한 향도 사라진다. 웅어는 30~40센티미터까지 자란다. 위턱이 길고 몸통은 뒤로 갈수록 가늘어져 칼끝처럼 날렵하다. 가슴지느러미에 실처럼 긴 줄이 몇 개 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웅어를 “도어(魛魚)라고 하고 속명은 위어(葦魚)”라고 했다. “크기는 1자 남짓이다. 소어(蘇魚, 밴댕이)와 유사하지만 꼬리가 소어보다 매우 길다. 색이 희다. 맛은 지극히 달고 진해 회 중에서도 윗길이다”고 했다. 혀에 감기는 부드러움과 달콤하며 진한 맛, 감히 회 중에서 최고라고 꼽은 이유다.
『전어지』에는 “웅어는 강과 호수가 바다 입구와 통하는 곳에서 나온다. 매년 4월에 강으로 거슬러 오르는데 한강의 행주(杏洲), 임진강의 동파탄(東坡灘) 상하류, 평양의 대동강에서 가장 많다. 4월이 지나면 없어진다”고 했다.
웅어와 관련된 기록은 1469년(예종 1) 김겸광(金謙光, 1419~1490)이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나온다. 여기에 “김해부 남포의 ‘어량(魚梁)’에서 위어가 잡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량은 물고기를 잡는 도구로 모양은 죽방렴과 비슷하다. 웅어는 옛 문헌에 위어(葦魚)로 표기되어 있다. 다만 중국 문헌에는 도어, 제어(鮆魚), 멸도(鱴刀), 열어(鮤魚), 조어 등의 표기는 있지만 위어는 보이지 않는다. 위어란 강 하구에 자라는 갈대(葦)에 알을 낳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웅어는 조선 초기부터 임금의 수라상에 올랐고, 궁궐은 물론 종묘에 천신하는 물고기였다. 그만큼 수요가 많았으니 양반들의 필요에 충분한 양을 잡아서 바쳐야 할 위어소(葦魚所)를 한강 하류에 두루 설치했다.『세종실록지리지』 「부평도호부 양천현」에 “양화도(楊花渡: 서울 마포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나루) 아래에서 주로 위어葦魚(웅어), 수어水魚(숭어), 면어鮸魚(민어)가 난다”고 했다.
궁궐의 음식을 담당하는 사옹원(司饔院)은 안산, 김포 등에 위어소를 두었다. 멸치류들이 그렇듯이 잡은 즉시 얼음에 재워 보관하거나 염장을 하지 않으면 오래 두고 먹기 어렵다. 낙동강, 영산강, 금강 하구에도 웅어가 잡히지만 위어소를 한강 하류 곳곳에 설치한 이유다. 그러니 웅어를 잡는 어부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입맛은 같은데 궁궐을 핑계로 얼마나 많은 높은 사람들이 웅어를 탐했겠는가?
관리들이
웅어를
빼앗는다
광해군 때 사옹원이 위어소 어부가 올린 소장을 올렸다. 5개 읍을 통틀어 300호였는데, 난리를 겪은 뒤 현재 남아서 그 역에 응하는 집은 겨우 100호밖에 안 되는데도 온갖 잡역이 더해져 살기가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어부가 직접 청원한 해당 지역은 한강 하류 고양, 교하, 김포, 통진, 양천 지역이다. 사옹원에는 어장이나 어살에서 물고기를 잡는 일을 감독하는 감착관監捉官(감찰관)이라는 벼슬아치가 있었다. 이들은 웅어가 회귀하기 전에 통진 현지 어장에 도착해 있었으니 어부들의 고단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에서 오롯이 물고기를 잡아 진상하도록 위어소를 만들었다. 조세나 다른 역을 면제해주었지만, 어부의 호수는 감소하고 조세는 면제해주지 않으면서 각종 잡역을 일반 백성과 똑같이 부과해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조정에서도 ‘복호(復戶)’, 즉 조세를 법대로 한결같이 면제하지는 못할지라도 새로운 역은 일절 부과하지 말고 물고기만 진상하도록 했다.
『중종실록』 1515년(중종 10) 윤4월 17일에 왕비 장경왕후를 모신 영경전(永慶殿)에서 삼우제를 마치고 졸곡제(卒哭祭)를 지낼 때 대간(臺諫)이 “사옹원이 위어를 잡아 진상할 때에 승정원(承政院)이 졸곡 전에 편지를 보내서 그것을 구하여 젓갈을 담가두었다가 뒷날의 식용食用으로 제공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후설喉舌(승지)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 소행이 이와 같으니 직에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모두 체임(遞任)하소서”라고 아뢰기도 했다. 이는 웅어의 위상을 가늠해볼 만한 내용이다.
또 조선 후기 문신 김재찬(金載瓚, 1746~1827)의 유고집인 『해석유고(海石遺稿)』 「어부사시사」에서 “물고기 잡고 위어소를 지나지 마오. 고생하여 얻은 물고기를 관리가 빼앗는다오”라고 했다. 왕실에 진상한 것뿐만 아니라 관리들의 횡포가 심했다는 것이다.
특히 웅어가 한강에 올라올 때, 경기도 양천군 행주 일대 한강(행호杏湖, 현재 행주대교 일대)에서 그물로 잡은 웅어를 회로 먹으며 하는 선유(船遊) 놀이를 즐기는 지체 높은 양반이 많았다. 행호의 웅어는 웅어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행호의 명승지에서 시와 그림을 그리며 웅어회와 복탕으로 복달임을 하며 식탐을 즐기는 ‘웅어회’ 모임이 있었다. 복달임은 ‘삼복에 몸을 보하는 음식을 먹고 시원한 물가를 찾아가 더위를 이기는 일’이다. 조선 후기 화가 겸재(鄭敾) 정선(鄭敾, 1676~1759)의 <행호관어(杏湖觀漁)>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그림은 정선이 양천 군수로 있을 때 그렸다. 왕실이나 관리들의 여름 식탐에 빠지지 않았던 탓에 웅어를 잡는 어부들의 고통은 날로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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