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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바다 인문학>

06.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바닷물고기 '숭어'

by BOOKCAST 2022.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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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바닷물고기


『해동역사』를 보면, 발해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때 외교 선물로 숭어를 준비했다고 한다. 또 숭어는 조선시대에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이유로 숭어(崇漁)라고도 불렸다. 조선시대에 숭어 중에서 평양의 대동강에서 잡은 동숭어를 으뜸으로 쳤다. 『승정원일기』 1886년(고종 23) 10월 22일에는 고종 때 대왕대비의 생일잔치에 동숭어회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평양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냉면과 함께 대동강 숭엇국이 꼽힌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에게 보낸 편지에도 동숭어를 선물로 보내니 기쁜 마음으로 받아 달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평양 대동강에서 잡은 동숭어를 으뜸으로 여겼고, 고종 때 대왕대비의 생일잔치에 동숭어회를 올리기도 했다. 일본의 판화가 안도 히로시게(安藤広重)의 물고기 연작 중 <숭어>.
 

허균이 지은 『성소부부고』의 「도문대작」에는 “수어는 서해에 모두 서식한다. 경강의 것이 가장 좋고, 나주에서 잡은 것은 지극히 크다. 평양의 것은 언 것이 좋다”고 했다. 역시 평양의 동숭어를 꼽았다. 아마도 겨울철 얼어붙은 대동강에서 잡은 숭어가 아닐까 싶다. 경강(京江)은 양화도 인근, 나주는 영산강을 말한다.

숭어는 강과 바다를 오가는 어류지만 바닷물고기다. 그래서 『난호어목지』에는 숭어를 민물고기로 분류하기도 했다. 한강, 금강, 영산강 등 상류까지 숭어가 올라왔던 것도 이런 숭어의 생태적 특징 때문이다. 영산강 하구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나주 영산포 사람 중에 구진포 앙암바위까지 올라온 숭어와 장어를 잡아 생계를 잇는 사람도 있었다. 산 사람뿐만 아니라 귀신들도 숭어를 좋아하는지 제사상에 숭어가 오르기도 했다.

숭어는 민물과 바닷물을 오가는 어류다. 이를 두고 민속학에서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영물로 여겼다. 그래서 큰 굿이나 제사에 제물로 올렸다. 서울 진오귀굿에서는 숭어가 망자를 상징하기도 했다. 숭어는 영산강이나 한강이나 낙동강이나 강어귀의 터줏대감이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숭어는 개흙을 먹으므로 백약(百藥)에 어울린다”고 했다. 연안이 깨끗하고 갯벌이 오염되지 않았던 시절에 맞는 말이다. 또 『난호어목지』에는 “숭어는 성질이 진흙을 먹기를 좋아하므로 숭어를 먹으면 비장(脾臟)에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숭어는 갯벌에 사는 유기물을 먹고 자란다. 숭어가 앉은 자리는 개흙도 고소하다고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숭어가 뛰니까
망둑어도
뛴다


부산 가덕도 대항마을에는 200여 년을 이어온 독특한 숭어잡이가 있다. 통영·거제· 부산 일대에 성행했던 ‘숭어들이’로, 육소장망 어법으로 등록된 들망 어업의 일종이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3월부터 5월까지 봄 한철 대항마을 주민 20여 명이 숭어잡이에 나선다. 배 6척에 나누어 탄 주민들이 그물을 펼쳐 잡는 어법이다. 주민들은 배를 타고 숭어가 지나는 길목에 기다렸다가 잡는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어로장이다. 숭어 떼가 오는 것을 물빛과 그림자로 판단해 산 위에서 배에서 기다리는 주민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어로장은 40~50년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맡는다. 한 번 그물질에 3만여 마리까지 잡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쉽게 차를 이용해 시내로 운반이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배로 옮겨야 했다. 그래서 소비할 양이 넘치면 살려주었다가 다음 날에 잡기도 했다. 주민들은 봄철 몇 달은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 배 위에서 생활한다.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있어 어로장이 숭어를 볼 수 없다고 판단해 철수를 결정하기 전까지 숭어잡이는 계속된다.

그런데 어쩌랴. 그물을 지킬 주민들은 나이가 들고, 숭어는 갈수록 줄었다. 여기에 인건비도 올라 더는 전통 방식으로 숭어를 잡기가 어렵게 되었다. 고육지책으로 자동화를 시도했다. 망대(望臺)에서는 어로장과 부어로장이, 배에서는 선장 1명이 지킨다. 사람의 힘으로 들어 올리던 그물은 이제 기계에 의존하고 있다. 애초 28명에서 19명으로, 2014년부터는 기계식으로 바꾸어 3명이 맡고 있다.

이마저도 숭어가 들어야 가능하다. 첫 ‘숭어들이’를 시작할 때 망루 뒤에 있는 역대 어로장을 모신 서낭에서 풍어제를 지낸다. 어로장이 되려면 물때는 기본이고 물빛, 바람, 숭어의 특성과 이동에 따라 그물을 조이는 순서 등 다양한 전통 어법을 익혀야 한다. 모두 도제식으로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진도 울돌목에서도 숭어를 기다렸다가 잡는다. 이를 ‘뜰채 숭어잡이’라고 한다. 조류가 거칠고 빠르기로 소문나 ‘명량’이라고 불렸다.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일본을 물리친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봄철이면 웅웅 하며 흐르는 명량을 거슬러 오르는 숭어를 잡는다. 거친 조류를 헤치고 지나다 힘에 부친 숭어들이 해안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 뜰채로 낚아채는 어법이다. 뜰채가 허공을 가르니 자루에 숭어가 퍼덕거린다. 구경꾼들이 탄성을 지른다. 진도대교를 만들던 인부들이 시작했다는 설과 해남 우수영에서 김씨가 뜰채를 이용해 숭어를 잡았다는 이야기 등이 전한다.

숭어를 잡는 가덕도의 전통 어법인 육소장망은 배 6척이 그물을 드리웠다가 숭어가 지나면 들어 올리는 들망 어업의 일종이다. 바다가 잘 보이는 망루에 있는 어로장의 지시에 따라 조업을 한다.
 

바다를 건너온 봄의 전령(傳令)들이 다도해를 지나 갯벌을 찾아 서해로 올라온다. 그중 우두머리 격인 놈들이 강으로 오르면 영산강에 기대어 사는 어부들은 발을 엮었다. 갈대로 만든 발을 강에 띄우고 그 앞에 떼줄을 놓았다. 그리고 몽둥이를 들고 수면을 치면 숭어가 놀라서 깊은 곳으로 몰려든다. 눈이 밝은 숭어가 떼줄을 보고 놀라 뛰어넘다가 떼발에 떨어지면 두들겨서 잡는 방법이다.

‘숭어가 뛰니까 망둑어도 뛴다’는 말처럼, 그 습성을 이용해 영산강 하류에서는 떼발로 숭어를 잡았다. 그물 체험이나 개막이 체험에 곧잘드는 어류도 숭어다. 패총에서도 숭어 뼈가 종종 발견되기도 하니 숭어와 인간의 인연은 오래되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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