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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바다 인문학>

04. 조선 시대에는 세금을 조기로 납부했다?

by BOOKCAST 2022.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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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로
세금을
납부하다

『세종실록지리지』 「나주목 영광군」에 “석수어(石首魚)는 군의 서쪽 파시평(波市坪)에서 난다. 봄· 여름 사이에 여러 곳의 어선이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는데, 관청에서 그 세금을 받아서 국용(國用)에 이바지한다”고 했다. 파시평은 칠산 바다를 말한다. 또 『세종실록지리지』 「황해도 해주목」에도 “토산(土産, 토산물)은 석수어가 주의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나고”라고 되어 있어 장소만 ‘연평평(연평도)’이라고 바뀔 뿐 같은 내용이 소개되었다. 두 곳 모두 조기의 주산지였다.

 

조기는 머리에 돌이 있어 ‘석수어’라고 했다. 고려시대 이자겸은 왕에게 굴비를 진상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겠다며 ‘굴비’라고 써서 보냈다.
 


조선시대에 조기는 제수용품, 진상품, 하사품, 약재, 장류, 조세 물품 등 다양한 쓰임새로 나타난다. 『태조실록』 1397년(태조 6) 4월 1일에 “새로 난 석수어를 종묘(宗廟)에 천신(薦新)했다”고 기록했다. 『세종실록』 1429년(세종 11) 8월 10일에 “조기(石首魚) 1천 마리(尾)를 명나라 진상품”으로 보냈고, 『성종실록』 1478년(성종 9) 12월 21일에 명나라 황제가 요구하는 진상품에 “조기 알젓(石首魚卵醢)”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또 왕이 신하나 종친에게 선물로 주는 하사품으로 석수어 알젓과 석수어가 등장한다.

조기는 조선시대에 쌀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세원이었다. 또 일제강점기에는 상갓집에 가면서 조의품으로 조기(석어石魚)를 하기도 했다. 완도군 군외면 달도에서 발견된 부의금 문서.
 

그뿐만 아니다. 조기가 유생들에게 제공하는 음식인 ‘공궤(供饋)’의 재원이었다. 『승정원일기』 1627년(인조 5) 5월 27일의 기록을 보면, 파시평 석수어잡이 어선 20척을 비롯해 전라도 어장은 임금이 하사한 곳이자 조세가 면제된 곳으로 성균관에 납부해 공궤로 사용하도록 했다. 오늘날 칠산 어장이 그 중심이다. 이렇게 조기잡이 어세(漁稅)는 조선 초기부터 국가의 중요한 재원(財源)으로 농사를 짓는 땅의 세금이 쌀이라면, 바다의 중요한 세원(稅源)은 조기였다. 다시 말해 쌀에 버금가는 품목이었다. 실제로 세금을 조기로 납부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조기 어장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일대의 서해와 남서해의 섬 지역을 둘러싼 바다다.

『한국수산지』는 “석수어는 경남도 마산 서북으로부터 평안도에 이르는 연해에서 나고, 조선인이 가장 즐겨 먹는 어류의 하나인데, 관혼상제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물품이다”고 적었다. 완도군 군외면 달도 폐가에서 발견된 일제강점기의 부의금 문서에는 상갓집에 가면서 조의 품으로 조기를 많이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칠산도, 고군산군도, 녹도, 연평도, 용호도 등에 조기 어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조기가
머무는 곳마다
파시가 열렸다


옛날에 배를 좀 탔다 하는 사람들은 칠산 바다의 기억과 무용담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칠산 바다와 연평 바다는 조기잡이 어부들이 그리워하는 어장이다. 임자도 북쪽에서 위도 일대까지를 흔히 ‘칠산 어장’이라고 부른다. 그 칠산 바다에서 가까운 곳으로는 법성포가 있고 내륙으로는 영산포까지 오갔다. 조기 어장이 끝나면 낙월도와 임자도 일대를 중심으로 젓새우 어장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뱃길이 법성포로 이어지고 있지만, 옛날에는 신안군 지도읍의 작은 섬들을 거쳐 목포로 이어졌다. 사람보다 조기와 젓새우가 더 많이 오갔던 뱃길이다.

조기 어장이 형성되면 법성포 목냉기에 술집이 번성했다. 어부들은 조금 물때에 들어와 식고미(식자재)를 준비해 칠산 바다로 나가는 길목에 배를 정박해두고 허기진 마음을 달랬다. 물길을 잘 아는 섬 주민들은 외줄낚시로도 만선을 했지만, 외지배들은 닻자망과 중선망으로 조기를 싹쓸이했다. 이제 그런 조기는 칠산 바다에서 찾기 어렵다. 그 대신에 잡어로 취급했던 물고기를 탐하는 자망이나 안강망이 놓여 있다.

충남 보령 녹도 어장은 주목망(柱木網: 갯골에 기둥을 세우고 자루그물을 매어 조류를 따라 그물로 들어오는 물고기를 잡는 전통 어법)을 이용해 조기를 잡았다. 주목망은 7~8발에 이르는 참나무 기둥을 세우고 자루그물을 매달아 조기를 잡는 정치망이다. 녹도와 두 개의 화사도(무인도) 사이에 주목망을 설치했다. 이때는 작은 섬에도 술집이 10여 개가 있을 정도로 성했다. 위도 치도리와 연평도에도 파시(波市)가 형성되었다. 파시는 조기, 고등어, 민어처럼 회유성(回游性) 어종이 많이 잡힐 때 어장 주변의 섬이나 해안에 어구점, 잡화점, 식당, 술집, 목욕탕 등 임시 점포가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이후 마을이 형성된 곳도 있다.

연평도 안목 어장은 ‘조기의 신’으로 불리는 임경업이 중국으로 가다 가시나무를 꽂아 조기를 잡았던 곳이다. 무속에서 모시는 신상神像을 표현한 <무신도巫神圖: 임경업 장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연평도에는 ‘조기의 신’으로 불리는 임경업 장군을 모신 사당인 충민사가 있다. 임경업은 병자호란 때 활약했던 장군이다. 조선과 청나라에서 버림받고 명나라로 망명하던 중 연평도에 들러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안목어장에 가시나무를 꽂아 조기를 잡아 병사들의 주린 배를 채웠다고 한다. 연평도 어민들은 임경업 장군에게서 조기잡이 어살법을 배웠다고 한다. 지금도 안목 어장에는 주민 10여 명이 주목망을 운영하고 있다.

오래전에 그곳에서 그물을 걷는 어부를 따라 어장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운 좋게 그물에 걸린 조기 두 마리를 발견했다. 알 밴 황금색 조기였다. 하지만 크기는 생각보다 작았다. 알 밴 작은 조기, 자연의순환이 아니라 인간의 간섭이 만들어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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