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천의
태씨가 잡았으니
명태라고 하다
명태는 명실공히 조선의 물고기다. 중국에서는 명태가 잡히지 않았고, 일본에서도 명란을 만들기 전까지 명태에 관심이 없었다. 중국어 밍타이(明太)나 일본어 멘타이(めんたい) 모두 조선의 명태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명태라는 이름이 문헌에 등장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다. 울산 출신 박계숙(朴繼叔, 1569~1646) ·박취문(朴就文, 1617~1690) 부자가 함경도 회령에서 근무한 것을 정리한 『부북일기(赴北日記)』의 1645년(인조 23) 4월 20일 일기에 ‘생명태(生明太)’가 등장하지만, 공식적인 것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652년(효종 3) 9월 10일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는 “강원도에서 대구 알젓 대신 명태 알젓이 왔으니 관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명태’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명태의 이름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명천(明川)에 태씨(太氏) 성을 가진 어부가 있었다. 어느 날 낚시로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 고을 관청의 주방(廚房: 조선시대에 궁궐 등에서 음식을 만들던 곳) 일을 보는 아전으로 하여금 도백(道伯: 관찰사)에게 드리게 했는데, 도백이 이를 맛있게 여겨 물고기 이름을 물으니 아무도 알지 못하고 단지 “태씨 어부가 잡은 것입니다”고만 대답했다. 이에 도백이 말하기를, “명천의 태씨가 잡았으니, 명태라고 이름을 붙이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 물고기가 해마다 수천 섬(纖)씩 잡혀 팔도에 두루 퍼지게 되었다.
명태라는 이름과 관련해서 함경도에서는 망태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명태의 이름과 가장 근접한 것이다. 또 『임하필기』에는 “함경도 원산을 지나다 이 물고기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오강(五江: 서울 근처의 한강 · 용산 · 마포 · 현호 · 서강 등 주요 나루가 있던 다섯 군데 마을)에 땔나무를 쌓아놓은 것처럼 그 숫자가 많아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고 했다.
동해에서 잡힌 명태가 한강 나루에 쌓여 있었던 것은 그만큼 ‘명태 무역’이 활발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변방의 생선’에서
‘백성의 생선’으로
처음부터 명태가 조선의 백성들이 먹는 생선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함경도 명천에서 잡히던 생선이 어떻게 남도 백성들의 밥상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 내력에 아픈 사연이 있다. 17세기 이후 숙종과 영조 대에 함경도는 이상기후로 흉년과 가뭄 등 자연재해가 잦았다. 그러자 전세(田稅)·공물(貢物)·진상(進上) 등을 면해주고, 사정이 조금 나은 남도의 여러 고을에서 곡식을 보냈다. 하지만 계속된 재해로 무상 진휼(賑恤)도 한계에 이르렀다. 그 결과 남부 지방의 쌀과 함경도의 명태를 교환하는 ‘명태 무역’이 생겨난 것이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명태의 동건법(凍乾法)과 유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742년(영조 18) 10월 27일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함경도에서 많이 잡히는 명태와 남도의 쌀을 교환하기 위해 국가가 직접 나서서 명태를 싸게 팔거나 뱃삯을 후하게 해주는 장려 정책을 추진했다. 이후 명태 무역은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경상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흥리(興利)’와 ‘상판(商販)’을 목적으로 하는 사무역(私貿易)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교환되었던 품목은 쌀 외에 돈·포목·곡물·소금· 패물 등이었다. 그리고 명태도 팔도로 팔려나갔다. 흉년이 심할수록 명태 무역도 활발했다.
조선시대 실학자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전어지(佃漁志)』에 “모두 원산에서 남으로 수송한다. 원산은 사방의 상인이 모두 모이는 곳이다. 배로 수송하는 것은 동해를 따라 내려오고, 말로 실어오는 것은 철령(鐵嶺)을 넘어온다. 밤낮으로 이어져 팔역(八域: 팔도)에도 흘러넘치게 된다. 우리나라 팔역에서 번성한 것은 오직 이 물고기와 청어가 최고인데, 이 물고기는 달고 따뜻하고 독이 없고, 온화한 중에 기를 보태주는 효험이 있어서 사람들이 더욱 중시한다”고 했다. 이 물고기가 바로 명태다. 명태를 실은 배가 동해를 돌아 남해와 서해로 올라와 팔도 곳곳에 닿게 되었다.
이렇게 명태가 팔도의 밥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동건법이라는 가공 기술 때문이었다. 명태의 몸통은 동건법으로 가공을 하고 알과 내장은 염장법으로 처리했다. 잡은 명태가 뭍에 오르면 아가미 밑에서 항문이 있는 꼬리 부분까지 절개했다. 이를 전문으로 하는 부녀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품삯으로 알을 가져가 명란젓을 만들었다.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에서 하는 가공법이 동건법이다. 내장을 꺼낸 명태는 덕장에 널린다. 추위가 심하고 바람이나 눈이 많은 곳이 좋다. 날씨가 추워 명태 속의 수분이 얼고 다시 풀리면서 부풀어 푸석푸석해진 북어가 상품이다. 명태가 20번쯤 얼고 녹아 만들어진 것이 황태다. 황태에 이르지 못한 것을 먹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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