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왕
가시이 겐타로,
바다를 점령하다
대구를 잡는 전통 어법은 어전이었다. 어전은 조기, 대구, 청어처럼 산란을 위해 연안으로 무리를 이루어 이동하는 어류를 포획하는 어법이다. 지역에 따라 어살 혹은 방렴이라고도 한다. 남해와 사천의 죽방렴도 원래 이름은 ‘경상도 방렴’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처럼 멸치가 아니라 대구나 청어 등을 잡았다.
조선시대에 대구는 거제도 특산물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거제현」에 “토공(土貢: 공물)은 대구어·문어·생포(生鮑: 전복) ·미역·우무(牛毛)·표고버섯·세모(細毛)”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대구 어장은 백성들이 소유할 수 없었다. 1906년 ‘칙지(勅旨: 대한제국에서 내리는 문서)’를 보면, 거제도·가덕도· 가조도 등 ‘어기(漁基: 어장)’를 의친왕부(義親王府)로 귀속시킨다고 명시하고, ‘어기파원(漁基派員)’이라는 관리를 보내 관리하게 했다.
조선시대에 대구는 어전세(漁箭稅), 소금은 염세(鹽稅), 배는 선세(船稅) 등 세금을 부과했다. 그만큼 중요한 소득원이었다. 이렇게 조정에서 ‘칙지’로 대구 어장을 황실 소유라고 명시하면서 오래도록 대구를 잡아온 지역 어민들과 관리의 분쟁이 잦았다. 게다가 황실에서는 이 황금 어장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절친이었던 가시이 겐타로(香椎 源太郎, 1867~1946)에게 20년 기한으로 임대해주어 어민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 농지와 달리 바다는 어장 위치를 명확하게 특정할 수 없고 수량도 명시하지 않았으니, 가시이 겐타로는 진해만을 모두 임대한 것처럼 행동했다.
가시이 겐타로는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1904년 러일전쟁 당시 거제도에서 군용 어류 통조림 사업, 황실 대구 어장 임차, 고등어 건착망 사업 등에 투자해 조선에서 ‘수산왕’이라고 불리던 재력가였다. 해방 후 일본인을 지원하는 단체인 부산 지역의 세화회(世話會)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해방 후에도 조선은 물론 바다까지 계속 소유하며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거제도 55개소, 가조도 10개소, 가덕도 7개소 등 70여 개의 어장이 있었다. 가시이 겐타로는 직접 이 어장을 운영하지 않고 다시 어민들에게 입찰을 통해 경매하면서 가격 경쟁을 시켜 임대료를 해마다올렸다. 토지로 말한다면 둔전(屯田)을 일본인 지주에게 장기 임대해주고 일본인 지주는 조선인 소작인에게 소작료를 받는 꼴이 된 것이다. 그러자 어민들의 불만이 극해 달해 탄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동아일보』(1926년 1월 11일)에는 “일본인 개인의 탐욕으로 인해 이래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며, 연서한 탄원서를 조선총독부와 황실에 제출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성질이
평하고
독이 없다
대구는 일찍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다. 건대구나 반건대구는 물론 대구 어란해(魚卵醢: 알젓)와 대구 고지해(이리젓) 등을 진상했으며, 종묘와 조정의 제례(祭禮)에도 진상품으로 올린 대구를 사용했다. 중국 황제의 장례식이나 즉위식과 혼인식에도 말린 대구를 보냈으며, 조선 후기에는 대일관계에서도 일본에 외교 물품인 사예단(私禮單: 일본에 가는 통역관이 사적으로 가져갔던 예물 단자(單子))으로 보내기도 했다. 또 관리의 급여나 하사품으로 지급되기도 했으며, 안부를 묻거나 인사를 할 때 고급품으로 주고받았다.
대구는 건조 방법, 크기, 색깔 등에 따라 이름도 다양하다. 아가미와 내장을 빼내고 통째로 말린 ‘통대구’, 배를 가르지 않고 알대구의 아가미와 내장을 입을 통해 빼낸 후 소금을 넣어 말린 ‘약대구’, 등을 갈라뼈를 제거하고 머리도 반으로 잘라 햇빛에 말린 ‘열작’, 생물인 ‘생대구’, 햇볕에 건조한 ‘건대구’, 크기가 작은 ‘보령대구’, 1자(약 30센티미터) 이상 큰 ‘도령대구’, 암컷인 ‘알대구’, 수컷인 ‘곤이대구’, 노랗게 말린 ‘황대구’, 하얗게 말린 ‘백대구’ 등 끝이 없다.
대구가 몸에 좋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약대구를 제일로 친다. 말하자면 약대구는 약이자 보신용 영양 식품이다. 약대구는 부잣집에서나 맛볼 수 있었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보면 약대구는 “알을 빼지 않고 온통 소금에 절였다가 여름에 내기도 한다”고 했다. 돈이 있는 통영의 여자들은 약대구로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 이를 ‘앉은 장사’라고 했다. 즉, 대구 철에 수백 마리를 사들여 큰 독에 알과 아가미를 따로 넣어 젓갈을 담고, 대구는 통대구로 만들어 팔았다. 특히 약대구는 곱으로 남는 장사라고 했다.
『난호어명고』에는 “소금을 뿌리지 않고 껍질째 빨리 말린 대구를 접(摺)”이라고 했다. 실제로 대구를 말리면 오그라들면서 주름이 생긴다. 대구는 “먹으면 기를 보하는데 반쯤 말린 것이 더욱 맛이 좋다”고 했다. 『동의보감』에는 “고기의 성질이 평하고 맛이 짜고 독이 없다. 먹으면 기운을 보하는데, 내장과 기름의 맛이 더욱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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