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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자기만의 산책>

07. 낸 셰퍼드

by BOOKCAST 2022.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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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산을 오르면서 생각의 황홀경에 잠기고,
완등하기 전에최후의 정상에 오르기 전에,
시간은 이렇게 빨리 흐른다길고 좁은 길 뒤에,
가파른 바윗길을 따라뾰족한 처마돌림띠를 두른 것 같은
눈 덮인 동굴 밑에서 얼음처럼 찬물이 굴러 떨어진다.
이제이 산중턱의 동굴에서정상도 아닌 곳에서,
새파란 세상도 보이지 않고멀리도달할 수 없지만,
하지만 이 회색 고원바위가 흩어져 있는거대하고조용한 곳,
그 어두운 호수그 고생스러운 험준한 바위들그 눈.
산은 그 안에서 문을 닫아버리지만그것은 하나의 세상.
그토록 광대한 세상그래서 아마도 마음은 이루리라,
크나큰 고생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허나 그것의 공포와 영광과
힘에 대한 거대하고어둡고불가사의한 느낌을.
- 낸 셰퍼드코이어 에차찬의 정상(Coire Etchachan)

 


낸 셰퍼드는 경험이 풍부한 산책자이자 산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다. 그녀는 몇 십 년의 세월에 걸쳐 자칭 왕래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 케언곰 산맥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알게 됐다. 산과의 친밀감은 그녀가 쓴 글의 핵심으로, 다년간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세 권의 소설과 시와 에세이와 편지가 나왔다. 산은 그녀의 이웃이며(그녀가 오랫동안 살았던 애버딘 근처 자택의 정원에서 산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그녀의 안식처이자 탈출구였다. 그녀는 시내에 있는 대학의 강사로 일하다 산에서 도피처를 찾곤 했다. 그녀의 명성이 절정에 달한 1931년 한 인터뷰에는 그녀가 할 수 있을 때마다 항상 산으로 도망치곤 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녀는 부활절에 내리는 눈에도 굴하지 않고 산비탈 위에 있는 작은 농장주인의 집에 가곤 했다. 하지만 가끔은 글 쓰다 한숨 돌리려고 산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난 겨울이 오기 전에 다시 소설 작업에서 도망칠 거야. 다음 주말에 산에서 또다시 행복한 한 주를 보내려고 해.” 그녀는 친구이자 동료 작가인 닐건(Neil Gunn)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에비모어로 가려고. 혹시 모르지, 어쩌면 거기서 시를 더 많이 쓸 수 있을지도. 어쨌든 나는 케인곰 산맥을 꼭 볼 거야. 그리고 벼랑과 차디찬 눈도 봐야지.” 종종 사람이 살기 힘들고 지내기도 힘든 곳에서 셰퍼드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안식처를 찾아냈다.

글쓰기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셰퍼드는 한동안 아주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녀가 쓴 소설 세 권은 1928년부터1933년까지 5년 동안 숨 가쁘게 출간됐고, 그다음 해에 출간된 시집도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그러다 침묵이 흘렀다. 적어도 공적으로는 그랬다. 무려 40년이란 세월이 흐른 1977년, 그녀의 생이 끝나갈 무렵 다시 작품이 출간됐다. 《살아 있는 산(The Living Mountain)》은 몇 십 년 전에 완성됐지만 숨겨져 있다가 애버딘 대학교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3만 단어로 이뤄진, 이 아름다운 작품은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셰퍼드의 글이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던 진실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클로츠나벤(Clochnaben)을 ‘당신의’ 산으로 봐서 기뻐요.” 소설가인 제시 케슨(Jessie Kesson)이 이렇게 썼다. 그는 셰퍼드의 친구이자 동료 등산가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단순히 보는 것 이상을 한다는 걸 알아요당신은 당신의 발밑에 있는 그것의 느낌을 알죠’. 당신의 얼굴에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고 당신은 산에서 그 냄새를 들이마시죠난 그걸 알아요나도 그러니까요나는 나라는 존재를 그 사랑하는 곳들과 하나로 합친답니다나와 산이 혼연일체가 되진 않았지만 (한때는 그랬지만그래도 더없이 행복하죠.
 
산에 대한 지식은 직접적인 만남과 ‘집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데, 셰퍼드는 워낙 집중력이 강해서 그녀의 존재 자체로 이 사랑하는 곳과 하나가 된다. 그러한 ‘집중력’은 또한 능숙한 언어 사용을 통해 드러난다. 그녀는 정확성을 서정적인 표현으로 대체하고, 놀라운 집중력으로 산에 대한 헌신을 나타냈고, 정밀성으로 찬사를 대신했고, 산에 대한 서술로 구성된 묘사를 해냈다.

《살아 있는 산》이 출간된 직후 그녀의 친구이자 동료 시인인 켄 모리스(Ken Morrice)는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로 셰퍼드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당신의 책은 정말 대단하군요.”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당신의 예리한 관찰과 뛰어난 시적 표현은 아주 잘 어울립니다. 당신의 글은 부드럽진 않습니다. 그보다는 강하고, 근육질이며, 생생하고, 경험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 이 책을 읽은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남아 있습니다.” 셰퍼드의 글이 강하다고 본 모리스의 의견에 케슨도 공감했다. 둘 다 그 글에 담긴 육체적인 능력과 경험이《살아 있는 산》을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었고, 그 책이 거둔 성공의 비결이라고 봤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셰퍼드가 쓴 글의 핵심은 인간의 육체적 움직임과 자기 성찰과 인간의 인생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자연 풍경 간의 복잡 미묘한 상호작용을 신중하면서도 절묘하게 표현해 낸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케언곰에서 한 경험을 통해 활기 넘치는 존재가 된 셰퍼드에게 산은 살아 있는 생물과 같았다. 셰퍼드의 글은 단순히 풍경에서 일방적으로 의미를 취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보다 그녀의 시와 산문을 보면 인간과 산은 둘 다 독립된 존재로 서로 의미를 공유할 수 있다는 강렬하고 깊은 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셰퍼드에게는 둘 다 각기 다른 존재로 대화와 거리와 공감을 통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케언곰 산맥의 산을 그녀가 ‘방문할’ 수 있는 ‘친구들’이라고 쓴다. 그리고 그런 산과 들과 같이 있을 때 그녀의 상상력은 마치 ‘다른 지성’과 접한 것처럼 환하게 빛난다. 하지만 이 말을 단순한 의인화로 오해해선 안 된다. 그보다 셰퍼드는 환생의 가능성, 인간과 돌 사이에 일종의 근본적인 물질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생기가 넘치는 돌이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석화가 되는 변화 말이다. 이런 엄청난 변신은 셰퍼드가 산에서, 산과 같이 걸음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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