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내 모습을 상상했을 때, 나는 이때쯤이면 첫 책을 출간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단편을 몇 개 썼을 것이고, 소설을 본격적으로 시도해 봤을 거라고. 하지만 지금 내 처지에 책은 꿈도 꿀 수 없다. 혼란스러웠던 지난해 글쓰기는 나를 영원히 떠나버린 것처럼 느껴졌지만, 도보 여행을 하면서 그 소설이 다시 내게 돌아오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내 머릿속을 떠도는 노래의 파편과 광고 CM 사이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날 아침 올드 스테이션에서 … 나는 시작해 보기로 결심했다.
- 셰릴 스트레이드, 《와일드(Wild)》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힘든 하이킹 코스다.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까지 2,650마일에 달하며, 미국의 서해안과 지극히 건조한 내륙 지방을 분리하는 다양한 산맥이 이어져 있다. 거기서 13,000피트 이상을 올라가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한 철에 이 코스를 다 돌고 싶은 사람은 다섯 달은 족히 잡아야 하고, 그것도 최악의 기상 환경인 시에라네바다산맥의 늦겨울에 내리는 눈을 피하고, 산에서 다음 겨울을 맞기 전에 북쪽에 도착할 수 있도록 날짜를 신중하게 잡아야 한다. 이 길의 가장 긴 코스 또는 코스 전체를 다 걷기 위해 세워야 할 계획은 생각만 해도 벅차다. 코스는 정착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도보 여행자들은 그 코스를 종주하는 데 필요한 음식, 옷, 물과 다른 장비를 지고 끝까지 갈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필요한 물품을 소포로 부쳐서 그때그때 자신이 가는 코스 근처에 있는 우체국이나 잡화점에서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해도 한 철에 그 코스를 완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까지 그곳을 완주한 사람 중 대략 3 분의 1이 여성이었다.
셰릴 스트레이드는 1995년 스물여섯 살에 결혼 생활이 파경을 맞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마약에도 손을 댔고 그런 시기에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의 일부를 걷기 위해 혼자 길을 떠났다. 그 후 석 달에 걸쳐 그 트레일의 두 구간을 횡단해서 총 1,100마일을 걸었고, 그 여정을 2012년 출간한 회고록인 《와일드》에 풀어놨다. 리즈 위더스푼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가 2014년 개봉됐다. 스트레이드는 장기 도보 여행을 전혀 해본 적도 없이 혼자서 PCT를 떠나기로 했다.
우연히 집어든 여행안내서 때문이었다.
나는 그 코스를 걷겠다고 결심했다. 적어도 100일 동안 걸을 수 있을 만큼 걷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미네소타주의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스튜디오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남편과 헤어져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었는데 살면서 이토록 바닥까지 내려와 정신적으로 고통 받은 건 처음이었다. 매일 깊은 우물 속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우물에서 나와 혼자 황무지를 걷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못할 것도 없잖아?
스트레이드의 순진한 낙관주의는 대책 없는 오판에 가까웠고, 장기 도보 여행의 어려움을 잘 아는 노련한 여행자라면 그녀의 말에 발끈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스트레이드가 한 호언장담의 뿌리는 자존심이 아니라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필사적인 마음이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미 수많은 존재’, 그러니까 ‘사랑하는 아내’에서 ‘간통녀’로, ‘사랑하는 딸’에서 ‘의미도 없는 직업을 전전하며 마약에도 손을 대고 많은 남자와 자고 다닌 작가 지망생’으로 살아왔지만 ‘1,100마일의 황무지를 혼자 걷는 여자’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런 여자는 세상의 비난을 받기보다 존경을 받을 것이고, 동정받기보다 찬사를 받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느낄지도 모른다.
이런 정체성을 획득하는 수단은 고통과 절망과 좌절을 통해서만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스트레이드는 곧 배우게 된다. PCT의 혹독함에 전혀 준비가 안 된 스트레이드는 여행을 출발하는 순간부터 크나큰 육체적 고통과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무지에서 비롯된 그 고통은 그녀가 계속 앞으로 걸어가자 정화의 한 형태가 됐다. 발에서 피가 날 때까지 걸음으로써 스트레이드는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했던 모든 형편없는 짓을 고통으로 지워냈다. 퍼시픽 트레일 웨스트를 걷는 행동을 통해 스트레이드는 자신이 변할 수 있다는 점을 믿게 됐다.
'인문 > <자기만의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린다 크랙넬 (마지막 회) (1) | 2022.04.30 |
---|---|
08. 아나이스 닌 (1) | 2022.04.28 |
07. 낸 셰퍼드 (2) | 2022.04.27 |
06. 버니지아 울프 (3) | 2022.04.26 |
05. 해리엇 마티노 (2) | 2022.04.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