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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자기만의 산책>

10. 린다 크랙넬 (마지막 회)

by BOOKCAST 2022.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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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든 그걸 쓰는 것은 대체로 다시 쓰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반복해서 하는 걷기로 생각한다모양이 다양하거나 방향이 바뀌는 고리 같은 것으로 본다우리의 기억을 다시 찾아가 보는 것도 이와 같다우리는 기억을 되짚어 보는 과정에서 그걸 미묘하게 재구성한다그래서 우리 인생의 이야기는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객관적인 현실이라기보다는 다시 만들고 또 만드는 상상의 연극과 더 비슷하다.
- 린다 크랙넬, 되돌아가다
 
도로시 워즈워스, 낸 셰퍼드, 아나이스 닌, 린다 크랙넬을 포함해 걷는 여성들에게 같은 곳을 다시 걷는 행위는 현재의 자아와 미래를 연결해 준다. 인간의 짧은 수명이란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길의 힘 덕분에 우리는 과거의 자아와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고, 앞으로 올 미래의 자아를 위해 그 길을 열어놓을 수 있다. 크랙넬에게 (그리고 셰퍼드와 닌과 그들보다 앞서 걸은 워즈워스에게) 갔던 길을 다시 걷는 것은 시간을 거슬러 손을 뻗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개인과 공감으로 연결되는 수단이기도 하다. 2014년 크랙넬은 《되돌아가다(Doubling Back)》란 책을 출간했는데, 그 책의 목적은 과거의 중요성으로 가득 찬 길을 다시 걸음으로써 연대의 힘과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지난 발자국을 되짚어가고, 지나갔던 길을 다시 걸으려는 시도에는 위험이 존재한다. 크랙넬은 콘월의 보스캐슬 마을을 방문한지 30년이 지난 후에 이곳으로 돌아와 아주 부드럽게 발을 디디면서 다녔다. 새 추억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옛 추억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서였고, 과거가 지나간 길에 너무 묵직한 발자국을 남겨서 꿈을 박살낼까 봐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그곳으로 돌아가 보니 거기서 보냈던 시간들의 경이로움이나 생기는 하나도 부서지지 않았다. 그보다 크랙넬은 걷는 사람의 경이와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다. 자신이 여행을 시작한 곳에서 과거를 돌아보니 그동안 자신의 발이 얼마나 멀리까지 자신을 데리고 왔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을 되짚어봄으로써 크랙넬은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는 법을 배우고 있던 17세 소녀와 2008년 글을 쓰고 있는 여인 사이에 놓인 뚜렷한 길”을 볼 수 있게 됐다. 크랙넬은 그런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그렇게 다르지 않다. 나는 성장해서 … 문학뿐만 아니라 길과 걷기에 대한 열정에서 벗어난 게 아니다. 현재의 나는 그저 그 길을 따라 전보다 더 멀리 온 나 자신일 뿐이다.”

하지만 크랙넬이 걷는 목적은 젊은 자신과 다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난 이들과 연결될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녀는 고인이 된 이들이 걸었던 길들을 답사하는 방식으로 걷기를 통해 그들과 공감하려 한다. 크랙넬은 ‘인간적인 반향이 울려 퍼지는 길을’걷기를 바랐고, 자신의 몸을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해 ‘다른 이의 이야기를 다시 해서’ 사람들에게 잊힌 이들의 중요한 뭔가를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다. 크랙넬과 도로시 워즈워스와 다른 여성 산책자들에게 걷는 몸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연결되는 하나의 도관이 된다. 육체적 자아 자체가 시간, 이야기, 삶이 모두 교차되는 도구인 것이다. 크랙넬에게 이 점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그녀가 되짚어가는 길 중 하나가 바로 그녀의 아버지가 걸었던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이며 그녀가 어렸을 때 암으로 사망했다. 이 책에서 크랙넬은 아버지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말을 익히기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없이 자라야했지만,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걸음으로써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적었다. 이 발자국이 크랙넬을 알프스로 이끌었다.

 

 

그곳은 크랙넬의 아버지가 옥스퍼드 대학에 다니면서 옥스퍼드 대학 등산회의 일원으로 활동했을 때 등반한 곳이다. 아버지가 올랐던 높고 반짝거리는 봉우리에 둘러싸인 크랙넬은 자신의 아버지를 알프스에서 야영하는 무리의 생명이자 영혼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크랙넬은 핀스터아어호른산에 오를 때 아버지가 갔던 곳과 같은 길을 감으로써 아버지에게 일종의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그녀는 성인으로서의 인생이 시작되기 전에 모험을 하면서 알프스의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생명의 환희를 느꼈을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했다. 반세기 후에 크랙넬 자신이 그 길을 걸으며 그 환희를 절절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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