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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람 공간 건축>

01. 동굴 밖을 향한 인류

by BOOKCAST 2022.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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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집은 동굴이었다. 물론 인간이 동굴에만 거주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머물기에 적절한 자연환경을 갖춘 지역에서는 숲속에 거주하기도 했다. 거주지가 동굴이든 숲속이든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거주지의 요소와는 개념부터 달랐다. 최초의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거주지의 요소는 생존에 대한 보장이었다.

원시시대의 생활 방식은 대부분 집단 형태였고 개인의 욕구 충족이나 소규모 집단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공동체적인 사회 구조와 지배 구조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개인의 정체성보다 집단의 성향이 더 중요했다. 집단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로 발달 과정을 거친 탓에 사회 발달 속도가 늦었고, 다양한 사회를 구성하기도 힘들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대단위 집단이 동굴이나 숲속의 작은 영역에서 공동으로 거주하기에 어려움이 따르면서 집단의 형태는 분화되기 시작했다. 분화된 집단 속에서도 결정권자의 독단적인 역할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존재했지만 모든 구성원이 결정권자의 영역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은 대단한 혁명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영역으로 제한된 동굴 속에서 모든 무리가 생활할 경우 집단의 규칙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했으므로 개인의 잠재력은 무시되었을 것이고 특히 개성이 다른 구성원의 경우에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고 절대 권력자의 시야 범위에 있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종족의 번식으로 인해 집단이 소규모로 분산되어 무리의 범위에서 멀어질 때 보호 영역에서 벗어난다는 불안감도 따르지만 그보다 미미하게나마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같은 현상은 점차 확대되는 추세였다. 권력자는 모든 무리를 자신의 영역 안에 두지 못하는 것을 불만족스러워했지만 식량 공급과 영역 다툼이라는 생존과 맞닥뜨린 문제로 인해 이 같은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보호와 자유라는 두 개의 선택지가 생겼다. 이때 인류는 자유를 선택했고 보호는 스스로 만들어가기로 했다. 동굴의 제한된 영역은 증가하는 무리의 숫자를 다 수용할 수 없었기에 일부는 동굴 밖을 선택해야 했다. 인류가 동굴로 들어간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맹수로부터 안전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자연의 변화, 즉 기후 때문이었다. 동굴 밖을 선택한 무리는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고, 이 두 가지를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건축이었다.


동굴은 외부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건축물은 내부와 외부로 구분된다. 동굴의 입구는 거대한 맹수에게는 장애물로 작용하지만 동굴 밖의 건축물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안전하지 않다. 인간 사회의 발달은 초기에 위험에 대한 방어 작용에서 본능적으로 시작되었다. 동굴에서 방출된 집단도 처음에는 다른 동굴을 찾아 떠났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집단생활을 영위하다 분리된 부류는 안전한 주거와 식량이라는 공통분모를 만족하는 지역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며 결국 식량을 구하기 쉬운 지역을 선택했을 확률이 더 높다. 이것이 인류역사에서 물가에 주거 흔적이 더 많이 발견되었던 이유다.

아프리카처럼 겨울이 드문 지역은 오히려 사계절이 존재하는 지역보다 거주지를 정하기 쉬웠을 것이다. 동굴에서 나온 부류들은 더 좋은 환경과 식량을 찾아 이동하였고 시간이 흐르면서 환경에 맞게 신체 조건이 적응하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렇게 정착한 부류들은 나름대로 생존 방법을 터득하며 여러 면에서 생활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발달 속에 건축은 인간 삶의 중요한 의미로 작용하게 되었다. 동굴 속에 살았던 인류는 가장 안전한 위치와 가장 좋은 자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동굴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그러한 상석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양화되어 가는 삶의 형태에 질서를 갖추기 위해서는 상석이 필요했다. 특히 선사시대(Prehistory, 인류가 문자를 발명해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의 시대) 이후 등장한 문자는 인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문자는 단지 의사소통의 기능뿐 아니라 지배 기능으로서의 역할도 갖게 되었다. 지배층은 권력의 상징이 필요했고 문자로 법과 규칙을 명료화하는 작업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건축이 그 시각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선사시대 이전과 이후로 건축 형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선사시대 건축은 자연환경과 맹수로부터의 보호라는 건축물의 기본적인 역할에 충실했다면 그 이후 건축물은 여러 가지 면에서 권력의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왜 자연으로부터 보호라는 기본적인 역할에 상징적인 기능이 추가된 것일까? 이 질문은 건축의 발달에 있어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건축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시작점이 된다.

초기 동굴에서 최고 권력자가 차지했던 영역의 상징적인 의미는 동굴을 벗어난 후에도 여전히 필요했던 것이다. 높은 자리, 충분한 영역, 그리고 가장 안전한 위치 등 권력자의 상징과 복종을 강요하는 무의식적인 행위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시시대 초기에는 건축이 물리적인 상징으로 작용했지만 인간 삶의 질과 인문학의 발달로 감성적이고 의미론적 그리고 부의 상징으로 건축의 역할은 또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초기 지도자의 자질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다양한 리더십보다는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인한 능력이 더욱 요구되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리더의 자질과 역할은 변화해 왔고 이러한 변화에 중요한 핵심이 바로 건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분야에서는 이와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지만 건축의 발달이 곧 삶의 변화뿐 아니라 모든 구조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생활의 기본 요소 세 가지는 의식주이다. ‘의(Dress)’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계절에 따른 방어에서 시작해 부끄러운 모습을 가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식(Food)’은 공복
을 해결해 주는 역할이다. 현대에 들어 ‘의’와 ‘식’은 인간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주는 역할도 갖지만 기본적인 역할 자체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주’에 해당하는 건축은 주거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옷과 음식에 따른 빈부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선택사항이다. 그러나 건축은 동굴을 벗어난 이후로 ‘의’와 ‘식’보다 생존에 관계된 부분 이상으로 시대가 변하면서 주어진 역할이 달라지고 있다.

주거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입고 먹는 것에 대한 문제보다 더욱 심각하게 삶의 안정감에 위협을 줄 수 있다. 우리가 문을 닫고 들어가 나만의 공간을 확보한다는 의미는 곧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정신적인 영역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환경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고 그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가장 작은 세계가 형성되고 사회가 만들어지며 이는 곧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되기도 한다.

공간은 정체성의 출발점이며 ‘의’나 ‘식’에서 찾을 수 없는 가장 안락한 영역을 제공한다. 그래서 건축은 ‘의’와 ‘식’에 비해 다양하지는 않지만 주거라는 본래의 목적을 넘어선 기능을 부여받았다. ‘의’와 ‘식’은 일시적인 특징이 있는 반면 건축은 지속성과 영역의 필요성이라는 특성으로 인하여 그 영역과 규모에 따라서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과거에는 건축이 의식주 중 하나라는 개념이 크게 자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 식량 싸움과는 달리 영역의 확보는 곧 건축물의 확보로 이어지며 이것이 다시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이어졌고 침략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로마가 다른 영토를 점령하면 점령한 지역에 대형 건축물을 지어 과시했던 것도 권력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축은 이렇게 고유의 기능을 넘어 또 다른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건축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가 된 것이다.

중세에 들어 건축은 권력뿐 아니라 종교적인 상징성을 가져야 했고 근세에 접어들면서 건축은 또 다른 의무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권력의 이동이었다. 부를 축적한 상인과 같은 일반 시민들이 상류층과 같은 건축물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사회적 지위는 없지만 당시 상류층의 빈곤을 해결하는 부류로서 건축물을 통해 지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권력자만의 시대였던 중세에는 볼 수 없었던 건축가들이 근세에 등장하게 되고 부를 가진 자들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이들을 위한 건축물을 설계하게 되는데 이것이 로톤다(별장)와 같은 건축물이다.

근세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부자들의 건축물은 그 시대의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고 건축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근세까지 건축이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 근세는 철학, 신학, 문학 그리고 법학이 주 학문이었다. 건축이 전공으로 그리고 전문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건축의 역사는 이미 인간의 역사와 궤를 함께했는데 근대에 들어서야 학문으로 인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건축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라는 의문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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