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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람 공간 건축>

05. 도시는 음악이다.

by BOOKCAST 2022.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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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경험이 만일 흥미롭고 유익한 것이라면 그 도시는 사랑을 받을 것이다. 이 경험이 바로 인간과 도시 간의 대화이다. 그런데 아무런 대화가 없는 침묵의 도시가 있다. 차라리 이것은 참을 만하다. 하지만 불쾌한 경험과 긴장감, 그리고 불안정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도시도 있다.

인간이 고등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촉감에 대해 절대가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차적인 욕구는 육체의 안정된 상황이다. 2차적인 욕구는 교환할 수 있는 풍족함이다. 이 2차적인 욕구는 경계선에 놓여있다. 1차적인 욕구와 경계를 이루는 것이 바로 정신적인 것이다. 좋은 사회는 이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관념을 존중한다.

이 정신적인 부분에서부터 우리는 인간임을 인정받게 되고 고등동물의 범주에 들어서게 된다. 1차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은 물질이다. 정신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은 예술이다. 그래서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이 분주한 시도를 통해 우리의 육체와 정신 사이에 트랜스포머(Transformer) 또한 분주히 움직인다. 숨을 쉬고 음식물을 먹으면 산소와 영양소가 심장과 각 기관을 통하여 공급되듯이 예술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육체와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인식하지만 이렇게 도시 속에는 심리적인 상황들도 분주히 작용하고 있다. 무의식과 의식을 연결하는 심리적인 요소들이 구체적인 사안으로 다뤄질 때 그 사회는 존중받는 사회가 될 것이다.

여기에는 시민의 수준이 상당히 중요하다. 모던의 시작인 아트 앤 크래프트(Art & Craft)의 운동가 윌리엄 모리스는 이를 깨닫고 시민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시민의 수준이 높으면 전문가가 인정받는 사회가 될 수 있지만 지식수준이 낮을 경우 모방과 표지만이 주를 이루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건축의 이해』의 저자 윌리엄 카우델은 박자를 건축에서 보는 창문의 나열에 비유하였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창문들이 나열되어 있다. 하나씩 나열되어 있을 경우 한 박자와 같으며 두 개씩 나열되어 있을 경우에는 두 박자와 같다. 세 개씩 나열되어 있으면 왈츠의 3박자 같은 배열, 그리고 네 개씩 나열되어 있는 경우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트로트의 4박자 배열이다.


예를 들어 차를 타고 지나가다 창밖을 바라볼 때 건물과 하천, 뒷산 등 명확한 요소가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이때 우리의 눈은 건물, 하천 또는 뒷산 등 명확한 요소를 바라보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이 세 가지 요소를 투영하여 머릿속에 이미지에 대한 기억을 저장한다. 긍정적인 저장을 위하여 각각의 요소들은 자신의 특징을 차별화하는 것이 좋으며 각 요소들을 어울림으로 보는 것이 좋다. 등고선이 뚜렷한 고저를 보이는 산이 있는 반면, 완만한 형태를 보이는 산도 있다. 하지만 이를 단번에 인식하기는 어렵다. 산은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는 반면 건축물은 디테일이 강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건축물들의 색깔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면 뒷산과 같은 배경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도시라는 것은 구성 요소에 의하여 그 성격이 구분되기 때문에 사람과 차량의 동선뿐 아니라 시각적인 동선의 계획도 있어야 한다. 자연과 같이 오랜 시간 다듬어진 완벽한 형태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상황에 인위적인 요소는 부수적으로 흡수되어야 한다.


위의 그림은 실제 어느 지역의 풍경을 토대로 산의 등고선과 건물의 스카이라인을 연결해 본 것이다. 이 선을 살펴보았을 때 두 선의 개성은 서로 강렬한 성격을 띤다. 이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즉 많은 것은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흐름이 단순한 등고선에 비해 다양한 스카이라인의 형태가 오히려 혼잡함을 유도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스러웠던 환경을 인위적으로 혼잡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자연의 흐름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다. 이 흐름은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자연에 인위적인 것을 첨가하고자 할 때 인위적인 요소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연과 ‘구분’해야 한다. 건축물이 반주라는 위치를 잃지 않고 멜로디의 흐름에 첨가되는 스스로의 역할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래의 사진은 평창의 휘닉스파크이다. 건축물(반주)이 들어서 있지만 등고선(멜로디)의 내용보다 많지 않으며 등고선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선의 흐름에 따라 건축물의 높이도 달라지고 있다. 현재 산등성이에 마구잡이로 들어서는 아파트를 보았을 때 이러한 광경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자연이 만들어 내는 음악의 흐름이 있다고 본다면 저곳에 존재하는 곡선들이 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이미 존재하는 이 멜로디를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반주를 첨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음악적인 동기를 유발하여 도시가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논해 보았다. 음악적이든 도시 건축적이든 궁극적으로 동일한 것은 설계의 처음부터 끝까지 잃으면 안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콘셉트라는 것이다. 도시가 추구하고자 하는 성격이 있어야 도시를 채우는 사람들의 목적이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기를 주지 못한다면 도시는 방향도 없으며 판단의 기준도 찾을 수 없게 된다. 도시는 자기만의 코드를 유지해야 한다. 시대적인 기술과 가능성이 도시의 콘셉트를 변화시킬 수는 있어도 기본적인 도시의 색은 유지해야 한다. 도시는 건물과 다르게 규모나 역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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