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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람 공간 건축>

07. 건축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by BOOKCAST 2022.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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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넘어 평등한 세상을 향해

프랑스 대혁명은 노예와 주인이라는 수직적 신분제도가 이끌어 왔던 봉건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신분인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수평적 신분제도가 자리하게 된 산업혁명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혁명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며 주변 봉건제도 국가들까지 영향을 미쳤다. 영국 같은 경우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의회 민주주의를 만들어 명예혁명이라 부른다.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불러왔고 이는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물리적인 상황이나 시대의 흐름에 의하여 변화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회 변화의 배경에는 정신적 지도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시민들이 깨어나기를 외쳤던 것이다.

인쇄술의 발달은 지식의 평등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 평등이 일어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루소, 칸트 등 많은 철학자들이 방향은 다르지만 시민들을 깨우치는 데 목소리를 높였다. 그중 칸트는 계몽주의를 외쳤다. 계몽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들은 칸트에게 계몽이 무엇인지 물었다. 칸트는 그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 과감하게 지식을 추구하라)!”

칸트는 지배자들이 사람들을 유순하고 어리석은 가축처럼 길들이려 한다고 외쳤다. 우리는 칸트와 같은 사람들을 지식인이라 부른다. 신앙과 왕의 시대였던 중세와 근세 바로크까지는 지식인의 등장이 불가능했다. 그러다가 수많은 전쟁으로 국가는 빚을 지고 약해진 반면 대중은 식민지를 통하여 넓은 세계를 보게 되면서 평등과 불평등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물론 프랑스의 세금 제도가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지만 유순하고 어리석었던 시민들이 혁명을 성공시킨 데에는 정신적인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를 프랑스 대혁명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인류의 대혁명이었다. 이러한 대혁명의 원인을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황이 변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중의 깨우침을 가장 큰 원인으로 본다.

근대의 시대적 코드는 기계이다. 이는 인류 최초의 1차 산업혁명을 이끌어 온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삶의 질을 바꾸면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불러왔다. 모든 분야가 변화하면서 건축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과거에는 석재와 목재가 주 건축 재료였던 반면 철과 유리와 같이 대량 생산이 가능한 새로운 건축 재료의 등장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수공업과 농업에만 매달려왔던 산업은 이제 기계를 통한 대량 생산으로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산업체가 있는 도시로 인구가 몰리면서 인구 밀집 현상과 함께 도시 재정비가 시작되었다. 기계의 발달은 또한 새로운 물건을 위한 홍보성 건축물, 즉 박람회장, 대형 창고, 회사, 백화점 등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건축물을 요구하였다.

산업혁명에 따라 새로운 상품을 알리는 박람회의 시초는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국가 차원이 아닌 도시 차원에서 행사를 개최했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가톨릭을 국교로 인정하고 절대 왕정에 대하여 교황청의 지원을 받고자 낭트칙령을 폐지하면서 프랑스의 산업혁명은 크게 위축되고 만다. 낭트칙령은 1598년 프랑스에서 개신교도들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는 법령이다. 한마디로 개신교도(위그노) 차별에 대한 금지령이다. 당시 가톨릭과 개신교도들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는데 가톨릭 세력의 위세로 개신교도들은 험난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분쟁은 급기야 1527년 개신교도들이 로마 교황청을 약탈하는 사건으로 번졌다.

문제는 그 당시 프랑스의 상공업자와 기술자 대부분이 위그노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낭트칙령의 폐지로 신변 보장을 받지 못하게 되자 해외로 이주하였다. 1685년에서 1689년까지 5년 동안 20~30만 명에 달하는 위그노들이 해외로 이주하면서 프랑스는 경제가 마비되는 지역이 속출했고 그로 인해 박람회 개최가 어려워졌다. 그중의 일부가 스위스로 이주해 지금의 스위스 시계를 발전시켰다고도 한다. 100년 후인 1787년 루이 16세가 관용 칙령을 선포하여 개신교도들이 자유를 얻게 되지만 이미 산업 일꾼들이 대거 빠져나간 프랑스는 밀려오는 산업혁명의 파도에 영국보다 대처가 늦고 말았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안정권에 든 1851년, 런던에 철골과 유리로 된 1,851피트(564m) 길이의 대형 박람회장을 지어 자신들의 산업 능력을 세계에 과시했다. 과거 석재와 목조 건축물만 봤던 시민들은 유리로 된 이 박람회 건축물을 보고 수정 같다고 하여 ‘수정궁’이라 불렀다. 40년 후인 1889년에 프랑스 또한 파리 박람회를 열어 그 입구에 거대한 철골건축물의 에펠탑을 선보였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수정궁(The Crystal Palace), 영국 1851년 5월 1일, The Great Exhibition of All Nations의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한 여왕 빅토리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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