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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람 공간 건축>

06. 욕망의 흥망성쇠

by BOOKCAST 2022.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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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아파트의 시작은 한마디로 호텔 평면도였다. 조선호텔에서 근무했던 정해직이라는 사람이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인 종암아파트의 계획과 건설에 참여하면서 아파트는 호텔의 모습을 담게 되었다. 그런데 현대의 아파트(5층 이상)와 연립주택(4층 이하)의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충정아파트이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것으로는 종암아파트가 최초이지만 건축물의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다.

충정아파트를 시작으로 전쟁 후 우리 사회에도 아파트에 대한 경험이 쌓이면서 주거 대책의 일환으로 아파트가 대안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파트를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후 많은 사람들이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서울로 모여들면서 서울은 혼란스러운 주거형태를 이루었다. 특히 개천이나 물이 흐르는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생활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그래서 물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면서 무허가촌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청계천 주변이었다.


제2청계천 무허가 건물 철거 간선도로변에 위치한 2,500여 동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면서 동대문구 창신동 일대(오간수교~제1, 2청계교) 2,000여 동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고 있는 모습, 1965
 

청계천은 서울 가운데 위치하여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아가기에 좋았다. 1950~1960년에 걸쳐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인하여 서울의 인구는 급증하였고 특히 청계천 주변은 어느 지역보다 사람들이 많이몰렸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무허가 건물로 어수선한 청계천을 보고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에게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충성심 강한 서울시장은 당장 이를 시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시민아파트의 등장 배경이다.

시민아파트는 이렇게 철거민 대상으로 등장했다. 서울 시장은 대통령의 지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불태웠지만 철거민이 너무 많아 대책을 세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일부는 서울을 떠나도록 설득하며 주거를 위한 방법으로 아파트를 계획했다. 이때 서울시장은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아냈다. 이주 지역에 모든 것을 마련해 놓았다는 조건을 믿고 이주했던 사람들은 이주한 지금의 성남(당시는 경기도 광주 소속) 지역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임에 분노하여 들고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경기도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서울 시장은 서울시에 남은 이들을 위한 대책으로 1969년에 400동, 1970년에 800동, 그리고 1971년에 800동, 총 2,000개 동의 서민아파트 건립을 계획하였다. 이는 실로 엄청난 주거 계획으로 실제 1969년도에는 목표보다 더 많은 406동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6개월 동안 이 많은 아파트를 완성했다는 것은 후에 많은 문제를 야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김현옥 서울시장은 안전모에 돌격이라 써 붙일 만큼 공사를 밀어붙였다. 서울시장의 불도저 같은 추진으로 1969년에 목표 이상을 채우고 1970년도에 800동을 목표로 41번째 아파트 공사를 진행하던 중 사고가 발생했다.

서울특별시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홍대거리 뒤 와우산 꼭대기에 세운 아파트는 1969년도 6월에 착공하여 6개월 만인 12월에 완공하였다. 건설 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이 공사기간에 아파트를 완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당시 공사 원가가 낮았고 공기도 짧아 대형 건설사는 참여하지 않고 대부분 공사 경험이 없는 소규모 업체들이 15개 동을 나누어 공사했다. 15개 동 중 13~15동은 대룡건설이 시공하였는데 이를 다시 박영배라는 무면허 업체에게 하청을 주었다. 이 업체는 철근 70개가 들어가야 하는 기둥에 단 5개를 사용했다. 콘크리트에 시멘트, 모래 그리고 자갈을 비율에 맞게 배합해야 하는데 시멘트 양도 줄였다. 공기도 짧고 지반 공사도 이행하지 않았으며 당시 공사에 참여했던 회사들은 암반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였다. 흙 위에 그대로 기둥을 세운 것이다. 아파트가 완공된 12월은 땅이 얼어 그런대로 지지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봄이 되어 해빙기가 오면서 흙이 녹아 기둥을 지탱하지 못한 아파트는 그대로 무너졌다.

처음에는 14동에서 이상이 생겨 이 아파트 거주민들만 대피시키고 수리를 하였는데 15동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부상을 당했다. 이외에도 문제는 많았다. 이 아파트는 빈민층의 입주를 목표로 하다 보니 1㎡당 280kg으로 하중 계산을 했다. 그런데 중간에 업체와 공무원이 공사비를 착취하면서 비용이 올라가고 브로커가 개입하여 다시 금액이 상승하자 빈민층은 입주를 포기하고 입주권을 소위 ‘딱지 팔기’를 하였다. 새로운 거주 형태인 아파트에 관심을 보인 중산층에서 입주권을 사면서 무거운 가구와 많은 세간살이로 인해 1㎡당 900kg으로 중량이 증가하여 구조적 문제가 발생했다. 계속된 하청으로 단가는 내려가고 이로 인해 자재의 급수 또한 계속 내려갔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30세대 중 아직 15세대만 입주한 상태로 많은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공사 중이던 회현아파트는 좀 더 보강하기로 결정했으며 200개의 시민아파트는 공사가 중지되었다.

당시 지은 서울의 시민아파트 목록을 보면 지금은 대부분 흔적을 찾아볼 수 없거나 재건축으로 바뀌었다. 구조적으로 위험하여 유지가 어려웠던 탓이다. 시민아파트는 골격만 갖추고 문이나 창문, 그리고 많은 부분을 입주자가 직접 설치를 한 후 입주해야 했기 때문에 구조적 문제뿐 아니라 상태 또한 문제가 많았다. 여기서 시민아파트의 건설은 중단되고 좀 더 좋은 질의 아파트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시범아파트였다.

 

여의도 시범아파트 복도형 통로, 엘레베이터, 냉·온수 급수와 스팀난방 등 최초의 현대적 단지형 고층아파트,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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