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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람 공간 건축>

04. 비어 있는 다락방

by BOOKCAST 2022.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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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시민들이 공유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도시는 시민들이 상상하는 기능을 다양하게 제공해야 한다.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는 역할은 건축물로는 부족하다. 도시는 건축물 외에 수 공간, 녹지 공간, 레크리에이션 공간 등도 제공해야 한다. 건축물은 도시를 위하여 세금을 지불하는 등 직접적인 역할을 제공하는 데 그 세금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서비스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공간들은 일부 계층에만 제공되어서는 안 되며 시민 모두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콘텐츠를 갖고 있는 도시에서 우리는 좋은 인상을 받는다.
“좋은 장소는 잘 기억되며 그것을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버클리대학 건축과 돈린 린든 교수의 말이다.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도시는 좋은 도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좋은 도시는 자연스럽게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어느 도시를 방문했을 때 긍정적인 감정이 발생한다면 그 장소는 기억될 수 있다. 린든 교수에 따르면 ‘장소’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공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 마음속의 공간을 의미한다. 도시계획가는 이 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좋은 기억은 어느 경우에 만들어지는가? 바로 기억의 자유이다. 그리고 도시는 기억의 시작이다. 영국 BBC One에서 방영된 드라마 《셜록》에서 홈즈는 “사람의 두뇌는 원래 비어 있는 다락방과 같다. 이를 당신이 갖고 있는 가구로 채우는 것이다”라고 했다. 동일한 상황을 맞이해도 모두가 동일하게 기억하지 않는 것은 기억의 공간에 우리가 받은 인상을 각자 다르게 배치하기(채우기) 때문이다. 도시는 종합적 큐비즘이다. 하나의 사물을 다양한 방향에서 또는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큐비즘이다. 도시는 이렇게 다양한 인상을 시민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도시의 흐름에는 큰 틀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우리의 언어가 있듯이 건축에는 건축 언어가 있으며 도시에는 도시적 언어가 있어야 한다.

명품 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며 명품 건축은 어떻게 설계되는가? 세계의 명품 도시를 찾아가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의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거리, 역사적인 건축물, 그리고 역사적인 도시 구조가 있다. 설령 건축물이 전쟁 통에 모두 사라졌다 해도 복원하고 재현해야 한다. 도시의 구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자연의 평원, 산 그리고 계곡이 형성되었듯이 도시 또한 오랜 시간을 거치며 모든 도로, 건축물 그리고 도시민을 위한 기능들이 배치되었다. 이것들은 마치 과거의 냄새를 풍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래를 위한 도시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 이렇게 역사적인 배치가 유지되어야 하며 도시의 발전은 그 역사적인 요소들을 건드리지 않는 상태에서 다른 영역으로 발전하는 게 옳다.

지금의 파리를 예로 들 수 있다. 파리는 시민혁명 이후 나폴레옹 3세가 오스만 남작을 파리시장으로 임명하면서 도시가 개조되었다. 그때 당시 파리 시내는 중세의 유산으로 인해 좁고 구부러진 도로가 많았다. 이런 구조는 바리케이드를 쉽게 설치할 수 있어 시위 진압에 어려움이 있었고 비위생적이며 교통체증 현상도 극심했다. 정부는 도시 정비 사업을 통해 도로 폭을 넓히고 직선화하였으며 상하수도망 재정비, 가스 가로등 설치, 대규모 녹지 조성 등을 통해 위생 상태와 도심 생활 환경을 크게 개선하였다.

사실 정비 사업의 가장 큰 목적은 폭동과 시위 장소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좁고 구부러진 골목을 넓고 직선화함으로써 시위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당시 폭동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후 통행을 막고 벌이는 일명 ‘바리케이드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도로 폭을 넓히고 직선화한다면 시위를 사전에 인지하고 진압군이 신속하게 접근하여 조기 진압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폴레옹 3세는 폭동을 조기에 신속히 진압하여 폭동이 혁명으로 번지는 것을 막아야 자신의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동기로 파리가 개조되었지만 파리는 결국 훌륭한 건축물들이 들어서 이야기로 가득한 도시가 되었다.

이후에 파리는 도심 확장을 위하여 도심에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데 그것이 바로 라데팡스이다. 파리의 이야기를 유지한 상태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과 개선문을 중심축으로 연장하여 새로 만들어진 이 도시 끝에는 새로운 개선문이 있다. 즉 도시 축을 연장시키면서 라데팡스라는 새로운 도시가 탄생했지만 사실은 파리가 연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에투알 개선문, 파리, 1836
 

 

그란데 아르슈 제2의 개선문, 라데팡스, 1989
 

우리가 도시를 방문한 후 기억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기억에 남는 중요한 포인트는 거의 비슷하다. 이를 우리는 랜드마크라 부른다. 도시는 두 가지 타입의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는 그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들이고 또 하나는 그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이다. 이 두 타입의 사람들을 위하여 공통적으로 도시가 제공하는 내용이 바로 건축물과 그 건축물의 주변에 있는 교통과 여가시설이다. 파리는 이 두 가지를 풍부하게 제공하기 때문에 최고의 도시로 여겨진다. 이것이 도시가 갖고 있는 콘텐츠이다. 백 개의 싸구려보다 한 개의 명품이 유리한 것처럼 도시를 대표하는 건축물 하나가 있으면 도시는 활기를 띠고 관광객들로 붐비게 된다. 건축물 하나가 도시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스페인의 작은 도시 빌바오가 증명하였다. 빌바오는 북부 스페인의 쇠락해가는 공업도시였으나 해체주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이곳에 구겐하임 미술관을 건축하면서 세계적인 명소로 탈바꿈하였다. 이를 ‘빌바오 효과’라고도 한다.

개념을 담은 도시의 공공 건축물이란 어떤 것인지, 왜 도시는 개념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개념은 곧 이해이다. 개념이 없으면 혼란스럽다. 도시도 개념이 없으면 혼란을 준다. 그렇다면 도시는 왜 읽혀야 하는가? 도시는 많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읽히지 않으면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는 ‘열어 두고’ ‘함께한다’는 개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곧 평등함을 뜻한다. 도시민 모두에게 도시는 평등해야 하는 것이다. 건축물은 도시의 기억 포인트이다. 도시의 모든 건축물은 좋은 기억으로 봉사해야 한다.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 Bilbao),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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