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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려라 메로스>

01. 다스 게마이네_당시, 내게는 하루하루가 만년(晩年)이었다.

by BOOKCAST 2022.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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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등(幻燈)

당시내게는 하루하루가 만년(晩年)이었다.
 
사랑을 했다.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에는 내 왼쪽 옆모습만을 보이며 나의 남자다움을 내세우고자 조바심을 냈고, 상대가 단 일 분이라도 망설이면 나는 금세 어쩔 줄 몰라 하며 거센 바람처럼 달아났다. 하지만 당시 매사에 야무지지 못했던 나는, 내 몸에 달라붙어 있다고 여긴, 상처를 최소화하는 그 현명한 자기방어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이른바 절도 없는 사랑을 했다.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목쉰 중얼거림이 내 사상의 전부였다. 스물다섯. 나는 지금 태어났다. 살아 있다. 끝까지, 살아가리라. 진심이다.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듯하다. 정사(情死)라는 낡은 개념을 몸으로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했을 즈음 나는 차갑게 거절당했고 단지 그뿐이었다. 상대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친구들은 나를 사노 지로자에몬(● 에도 중기 사람으로 사랑했던 기녀에게 이별 통보를 받자 그 기녀는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도 칼로 무참히 살해했다.) 혹은 사노 지노라는 옛사람 이름으로 불렀다.
 
“사노 지로, 그래도 다행이야. 그런 이름 덕분에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거라고. 차였는데도 그 정도면, 하늘이 도왔다는 증거겠지. 어쨌든 다행이야.”
 
바바가 그리 말한 것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나를 사노 지로 따위로 부르기 시작한 건 틀림없이 바바였다. 나는 바바와 우에노 공원 안의 단술집에서 알게 되었다. 기요미즈데라 바로 근처, 붉은 양탄자를 깐 평상 두 개를 늘어놓은 작은 단술집이었다.
 


강의 사이사이에 대학 뒷문에서 공원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와 단술집에 자주 들른 이유는, 그 가게에 열일곱의 기쿠라는, 몸집이 작고 총명한 얼굴에 눈이 맑은 여자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모습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꼭 닮아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려면 돈이 좀 드는 여자였기에, 돈이 없을 때는 단술집 평상에 앉아 단술 한 잔을 홀짝이면서, 그 기쿠라는 여자아이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 대신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올해 초봄, 나는 그 단술집에서 이상한 남자를 보았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아침부터 하늘이 청명했다. 프랑스 서정시 강의를 듣고 난 정오 무렵, ‘매화는 피었는가, 벚꽃은 아직인가’, 방금 배운 프랑스 서정시와는 전혀 다른, 알 수 없는 시구에 멋대로 가락을 붙여 반복해서 흥얼거리며 언제나 그렇듯 그 단술집을 찾았다. 손님은 이미 한 사람 와 있었다. 나는 놀랐다. 그 손님의 모습이 어딘가 기이했기 때문이다. 깡마른 몸에 키는 보통, 입고 있는 양복도 검은 모직의 평범한 옷이었는데, 그 위에 걸친 외투가 일단 괴상했다. 자세한 형태는 알 수 없었으나, 첫인상으로 말하자면 프리드리히 실러의 외투였다. 벨벳 소재에 단추가 터무니없이 주렁주렁 달린 멋스러운 짙은 은색 옷이었는데 말도 안 되게 할랑했다. 다음으론 얼굴. 이 역시 첫인상을 말하자면 슈베르트로 둔갑하다 실패한 여우 같았다. 신기할 정도로 튀어나온 이마, 작은 철테 안경, 심한 곱슬머리, 뾰족한 턱, 너저분한 수염. 피부는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휘파람새의 깃털처럼 지저분하게 푸르딩딩하고 윤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이가 양탄자 깔린 평상 한가운데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큼직한 사기 찻잔으로 나른한 듯 단술을 홀짝이며, 아아, 한쪽 손을 들어 이리 오라고 나를 부르는 게 아닌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점점 기이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직감이 밀려와, 나는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 남자가 있는 평상 끄트머리에 앉았다.
 
오늘 아침에 굉장히 딱딱한 오징어를 씹어서요.”
 
일부러 내리깐 듯한 낮고 쉰 목소리였다.
 
오른쪽 어금니가 엄청 아파요. 치통처럼 지독한 건 없죠. 아스피린을 왕창 털어 넣으면 싹 가시겠지만. 그나저나 당신을 부른 게 나였습니까? 죄송하게 됐네요. 내가 말입니다.”
 
내 얼굴을 흘끗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어갔다.
 
사람을 잘 못 알아봐요. 맹인은 아닙니다. 난 평범해요. 겉보기만 그럴 뿐, 내 나쁜 버릇이죠. 처음 만난 사람에게 좀 별나게 보이고 싶어서요. 자승자박이라는 말이 있죠. 심각한 고질병이에요. 그쪽은 문과? 올해 졸업인가요?”
 
나는 대답했다.
 
아니요. 한 해 더 남았습니다. 그게, 한 번 낙제했거든요.”
하아, 예술가군요.”
 
그는 무덤덤하게 단술을 한 모금 마셨다.
 
난 어쩌다 보니 여기 음대에 8년째 다니고 있어요. 졸업이 쉽지 않네요. 아직 한 번도 시험 날 출석해 본 적이 없거든요. 인간이 인간을 시험하다니 참으로 무례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근데 말이 그렇지, 실은 머리가 나쁜 거죠. 허구한 날 여기에 죽치고 앉아 눈앞에 걸어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데, 처음엔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데도 아무도 나를 모른다,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니, 그렇게까지 호응해 줄 건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쪽 마음을 말하고 있는 거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일쯤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히려 쾌감을 느끼죠. 베개 밑을 맑은 물이 졸졸 흘러가는 듯한. 체념이 아닙니다. 왕족이 느끼는 기쁨이에요.”
 
그는 꿀꺽꿀꺽 단술을 들이켜더니 찻잔을 내 쪽으로 쑥 내밀었다.
 
찻잔에 백마교불행(● 白馬驕不行. 당나라 시인 최국보가 쓴 오언절구 <소년행(少年行)>의 일부로 ‘백마는 교만하여 달리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쓰여 있죠. 안 되겠어. 이거 원 창피스러워서. 그쪽한테 물려주죠. 아사쿠사에 있는 골동품점에서 비싸게 사 와서 이 가게에 맡겨둔 겁니다. 내 전용 찻잔으로 말이죠. 난 그쪽 얼굴이 맘에 들어요. 눈동자 빛이 깊어. 동경하는 눈입니다. 내가 죽거든 이 찻잔을 써요. 난 내일쯤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 후로도 우리는 그 단술집에서 툭하면 만났다. 바바는 좀체 죽지 않았다. 죽기는커녕 살이 좀 붙었다. 푸르뎅뎅했던 두 뺨이 복숭아처럼 탐스러워졌다. 그는 그게 다 술살이라며 이렇게 살이 찌면 더 위험하다고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날이 갈수록 그와 친해졌다. 왜 나는 이런 남자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되레 가까워졌을까. 바바의 천재성을 믿어서였을까. 지난해 늦가을, 요제프 시게티라는 부다페스트 출신의 실력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일본에 와 히비야 공회당에서 세 번 정도 연주회를 열었지만, 세 번 모두 아무런 인기를 끌지 못했다. 고고하고 고집스러운 이 마흔 살의 천재는 발끈하여 <도쿄아사히신문> 일본인의 귀는 당나귀 귀다라며 악다구니를 퍼붓는 글을 기고했는데, 일본 청중에 대한 그 악담 끝에는 반드시 단 한 청년을 제외하고라는 말이 시의 후렴구처럼 괄호 속에 따라붙었다. 도대체가 그 한 청년이 누구냐며 음악계가 시끌시끌했는데 그이가 바로 바바였다. 바바는 요제프 시게티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히비야 공회당에서의 세 번째 수치스러운 연주회가 끝난 밤, 바바는 긴자에 자리한 어느 유명한 비어홀 안쪽에 놓인 화분의 나무 그림자에서 시게티의 불그스름하고 큰 대머리를 발견했다. 바바는 호응 받지 못한 그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애써 태연한 척 엷게 미소 지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 바로 옆 테이블로 주저 없이 성큼성큼 다가가 앉았다. 그날 밤, 바바와 시게티는 서로에게 공감하며 긴자 1번가서부터 8번가까지 늘어선 값비싼 주점을 한 집 한 집 순례했다. 값은 요제프 시게티가 지불했다. 시게티는 술을 마셔도 예의를 지켰다. 검정 나비넥타이를 단정히 맨 채로 아가씨들에게는 끝까지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이성과 지혜로 다듬어지지 않은 예술이 아니면 흥미가 없습니다, 문학 쪽으로는 앙드레 지드와 토마스 만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며 쓸쓸한 듯 오른손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지드를 치드라고 발음했다. 밤이 지나고 동이 틀 무렵, 두 사람은 데이코쿠 호텔 정원의 연못가에서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힘 빠진 악수를 나누고 허둥지둥 헤어졌다. 그날 시게티는 요코하마에서 엠프레스 오브 캐나다 호에 승선해 미국으로 떠났고, 다음 날 <도쿄아사히신문> 예의 그 후렴구 붙은 글이 실렸다. 하지만 나는, 바바가 쑥스러운 듯 눈을 격하게 깜빡거리면서 마지막에는 언짢아하며 들려주는 이런 식의 영웅담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그가 외국인과 밤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어학에 능통한지 의심스러웠다.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겠지만, 다 떠나서 그에게는 어떠한 음악적 이론이 있는지,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얼마나 실력이 있는지, 작곡가로서는 어떠한지, 그런 것조차 나는 하나도 알지 못한다. 바바는 이따금 반들반들 검게 빛나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다니곤 했는데, 속은 늘 비어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케이스 자체가 현대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안이 썰렁하고 텅 비어 있다, 라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이 남자가 과연 바이올린을 한 번이라도 쥐어본 적이 있을까 하는 이상한 의심마저 품게 되었다. 그런 식이었기에 그의 천재성을 믿든 안 믿든 그의 기량을 판단할 수조차 없었으므로, 내가 그에게 매료된 건 분명 다른 연유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바이올린보다는 바이올린 케이스에 더 신경을 쓰는 쪽이었기에 바바의 정신과 기량보다 그의 모습과 농담에 끌렸던 것도 같다. 그는 실로 옷을 자주 바꿔 입고 내 앞에 나타났다. 각종 양복 외에 교복을 입기도 하고 작업복을 입기도 하고 어떤 날은 허리띠에 흰 버선 차림으로 나타나는 바람에 당황스러워 얼굴을 붉힌 적도 있다.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이다지도 옷을 자주 바꿔 입는 이유는 남들에게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인상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빠뜨린 말이 있는데, 바바의 집은 도쿄 외곽의 미타카무라 시모렌자쿠에 있고, 그는 거기서 시내로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서 놀았다. 아버지는 지주인지 뭔지로 상당한 부자였기에 매번 옷을 바꿔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또한, 말하자면 지주 아들놈의 사치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고, 생각해 보면 나는 딱히 그의 겉모습에 끌린 것도 아니었다. 돈 때문이었을까? 매우 껄끄러운 이야기지만, 그와 둘이서 놀러 다니면 모든 계산을 그가 했다. 나를 밀치면서까지 계산했다. 우정과 금전 사이에는 더없이 미묘한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어서 그의 윤택함이 내게 어느 정도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바바와 나의 우정은 애당초 주종 관계였을 뿐,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내가 끌려다녔다는 이야기로 귀결될 수 있음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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