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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려라 메로스>

05. 다스 게마이네_“무슨 말이든 좋아. 할 마음은 있는 건가?”

by BOOKCAST 2022.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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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등용문

여기를 지나면 하나에 2전짜리 소라가 있으려나

“뭔가 터무니없는 잡지라고 하던데요.”

“아뇨, 평범한 팸플릿이에요.”

“바로 그런 말을 하는군요. 당신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많이 들어서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지드와 발레리를 꼼짝 못하게 할 잡지라면서요.”

“당신 여기 비웃으러 왔습니까?”

내가 잠깐 아래층으로 내려간 사이에 벌써 바바와 다자이가 말다툼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다기를 들고 방으로 갔더니 바바는 방구석 책상에 턱을 괴고 아무렇게나 앉아 있고, 다자이라는 남자는 바바와 대각선으로 마주 본 다른 한쪽 구석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가늘고 긴 털이 수북한 정강이를 앞으로 뻗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졸린 듯 반쯤 감긴 눈에 매우 나른한 듯 느릿느릿한 말투였지만, 속에선 분노와 살기로 천불이 끓어오르는 눈빛과 어린 뱀의 혓바닥처럼 홀홀 타오르는 말의 가시가 나까지 쉽게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사타케는 다자이 바로 옆에 길게 엎드려 누워 자못 지루한 듯 눈알을 굴려대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애당초 안 될 일이었다. 그날 아침, 내가 아직 자고 있는 동안 바바가 하숙집에 쳐들어왔다. 오늘은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그 위에 펑퍼짐한 노란색 비옷을 걸치고 있었다. 비에 흠뻑 젖은 그 비옷을 입은 채 방 안을 이리저리 빙빙 돌았다. 걸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이, 어이. 나 지독한 신경쇠약이 온 것 같아. 이렇게 비가 내리면 난 미쳐버릴 게 분명해. 해적 생각만으로도 살이 쑥쑥 빠지잖아. 어이, 일어나. 얼마 전에 다자이 오사무라는 남자를 만났어. 학교 선배가 소설을 기가 막히게 잘 쓰는 남자라며 소개해줬는데, 이런 운명이 다 있나! 우리 쪽에 끼워주기로 했어. 근데 다자이란 녀석, 무섭고 지독한 놈이야. 그래. 진짜 역겨운 놈이지. 혐오스러울 지경이라고. 난 저런 사내랑은 육체적으로 안 맞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머리는 빡빡이인데, 그것도 뭔가 사연 있는 빡빡이 같아. 악취미지. 그래, 맞아. 그 녀석 몸 여기저기를 장식하는 게 취미인가 봐. 소설가는 다들 저런가? 사색과 학구열, 열정 따위는 두고 온 거냐고. 애초에 뿌리부터가 통속적인 소설가야.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검푸르고 큰 얼굴에, 코가 레니에의 소설에서 묘사한 코랑 똑같이 생겼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코. 위기일발, 주먹코로 추락할 뻔한 코를 코 옆에 난 깊은 주름이 그걸 막았지. 레니에 글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굵고 짧고 새까맣고, 쭈뼛쭈뼛 소심해 보이는 작은 두 눈을 가릴만큼 무성한 눈썹도 싫어. 이마는 좁아터졌고, 주름이 옆으로 두 줄 선명히 새겨져 있어. 이미 글러 먹었다고. 목은 굵고 목덜미는 이상할 만치 둔해 보여. 턱 밑에 여드름 자국도 세 개나 발견했어. 내가 보기에 키는 173센티미터, 몸무게는 56킬로그램, 발은 265밀리쯤이고, 나이는 분명 서른이 안 됐을 거야. 아, 중요한 얘길 안 했네. 등이 완전히 굽었어. 꼽추라고. 잠깐 눈을 감고 그런 몰골의 남자를 상상해봐. 근데 이건 거짓말이야. 새빨간 거짓말. 완전 사기. 변장한 거야. 틀림없어. 하나부터 열까지 눈가림이라고. 내 눈은 틀리지 않아. 듬성듬성 자란 게을러터진 수염. 아니, 저 녀석에게 게으름이란 있을 수 없어. 어떤 경우라도 있을 리 없지. 부러 애써 기른 수염일 거야. 아아, 난 대체 누굴 말하는 거지! 보세요, 나는 지금 이러고 있고 저러고 있어요, 이렇게 일일이 설명을 하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헛기침 한 번 제대로 못 해. 지겨워! 그 녀석의 원래 얼굴은 눈도 입도 눈썹도 없는 달걀귀신이야. 눈썹을 그리고 눈코를 붙이고서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거지. 그것도 그걸 재주로 삼고 있어. 쳇! 난 그 녀석을 처음에 얼핏 봤을 때, 곤약으로 만든 혀가 내 얼굴을 날름 핥는 것 같았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인간들만 모여들었잖아. 사타케, 다자이, 사노 지로, 바바. 하핫, 이 네 사람이 그냥 잠자코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역사적이야. 그래! 난 하겠어. 이건 숙명이야. 싫은 사람도 좀 있어줘야 그게 또 재미지. 난 올해 딱 1년만 <Le Pirate>에 내 모든 운명을 걸겠어. 거지가 되거나 바이런이 되거나. 신이시여, 5펜스를 주시옵소서. 사타케의 음모 따위, 에라이 똥이다!”

그러고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어이, 일어나. 덧문을 열어두자. 이제 곧 다들 여기로 모일 거야. 오늘은 이 방에서 해적 회의를 열 거거든.”

나는 바바의 흥분에 덩달아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바바와 둘이 낡아서 잘 열리지 않는 덧문을 삐걱삐걱 억지로 열었다. 혼고 거리의 지붕이 비가 내려 부옇게 보였다.

낮에 사타케가 왔다. 비옷도 모자도 없이 벨벳 바지에 하늘색 털 재킷 차림에 얼굴은 비에 젖어 뺨이 달처럼 파랗게 빛나 묘한 색을 띠고 있었다. ‘야광충’은 우리에게 인사 한 마디도 없이 녹아버리듯 축 늘어져 방구석에 드러누웠다.

“이해해줘. 피곤해서 말이야.”

곧이어 다자이가 장지문을 열고 느릿느릿 나타났다. 보자마자 매우 당황해서 눈을 돌렸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의 모습은 바바의 묘사를 바탕으로 내가 그려본 좋은 쪽과 나쁜 쪽, 두 개의 초상 중 나쁜 쪽의 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꼭 들어맞았다. 더욱이 아니다 싶었던 것은 다자이의 복장이 바바가 평소 몹시 싫어하던 부류의 옷이었다는 점이다. 화려한 잔무늬가 어지러이 박힌 겹옷에 얼룩덜룩한 허리띠, 거친 격자무늬 헌팅캡, 연노란색과 하얀색 천으로 짠 내복이 옷자락 사이로 슬쩍슬쩍 보였다. 그 옷자락을 살짝 잡아 올리고 앉아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는 척하더니,

“거리에 비가 내리는군.”


하고 여자처럼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우리 쪽을 돌아보며 빨갛게 탁해진 눈을 실처럼 가늘게 뜨고 얼굴을 찡그리며 웃어 보였다. 나는 방에서 뛰쳐나와 차를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기와 쇠 주전자를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더니 이미 바바와 다자이가 싸우고 있었다.

다자이는 빡빡 깎은 머리 뒤로 두 손을 깍지 끼고 말했다.

“무슨 말이든 좋아. 할 마음은 있는 건가?”

“뭘 말입니까?”

“잡지. 이왕이면 같이해도 상관없고.”

“대체 여기 뭐하러 온 거요?”

“글쎄, 바람결에 떠밀려?”

“미리 말해두지만, 명령이나 경고, 농담, 그리고 그 능글맞은 웃음은 집어치워요.”

“그럼 그쪽한테 묻지. 왜 날 불렀나?”

“그러는 그쪽은 부르면 언제든 기어이 오나 보지?”


“뭐 그런 셈이지. 그래야 한다고 스스로 타이르니까.”

“인간 생업의 가장 첫 번째 의무, 뭐 그런 거?”

“좋을 대로.”

“거참, 말 희한하게 하시네. 반항적이야. 아, 됐어. 당신 같은 사람과 함께하느니 안 해!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나를 멍청이로 보겠지. 못 당하겠어.”

“그쪽이나 나나 애초부터 멍청이야. 멍청이는 하는 것도 되는 것도 아니지.”

“나는 존재한다. 커다란 거시기를 달고. 자, 이 물건을 어찌하겠나? 그런 느낌인데. 참 난감하군.”

“좀 심한 말일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횡설수설하지? 왠지 당신들은 예술가의 역사만 알지 예술가의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군.”

“비난인가? 아니면 연구 발표? 답지? 나한테 채점하란 거야?”

“중상모략이군.”

“그래, 횡설수설은 내 특징이야. 아주 보기 힘든 특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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