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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려라 메로스>

02. 다스 게마이네_바바가 편지를 보내왔다.

by BOOKCAST 2022.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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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등(幻燈)

아아, 말하다 보니 무심코 이실직고해버렸다. 결국, 그 무렵의 나는 아까도 잠깐 말했듯이 금붕어 똥처럼 의지력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생활을 했다. 금붕어가 헤엄치면 나도 쫄래쫄래 따라가는 똥처럼 바바와의 만남을 허무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팔십팔야(● 八十八夜. 입춘일로부터 88일째 되는 밤.)였다. 이상하리만치 바바는 달력에 꽤 민감해서, 오늘은 경신년의 불멸일(●佛滅日. 부처도 멸할 정도로 매우 불길한 날.)이라며 풀이 죽어 있는 날이 있다가도, 오늘은 단옷날이니 어둠 축제(● 등불을 끄고 제례를 지내는 축제.)라는 둥,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날도 나는 우에노 공원의 단술집에서 새끼 밴 고양이, 벚나무, 꽃보라, 송충이, 그런 풍경이 자아내는 완연한 늦봄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바바가 초록빛 화려한 양복을 입고서 어느 틈엔가 내 뒤쪽에 앉아 있었다. 여느 때처럼 낮은 목소리로 “오늘은 팔십팔야야.” 그렇게 한마디 중얼거리더니 겸연쩍었는지 벌떡 일어나 양어깨를 요란하게 흔들어댔다. 팔십팔야를 기념하자며, 웃으면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결심을 굳히고 우리는 아사쿠사로 술을 마시러 갔다. 그날 밤, 나는 갑작스레 바바에게서 떠날 수 없는 친밀감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아사쿠사의 술집을 대여섯 군데 들렀다. 빌헬름 플라지(●(1888~1969) 독일 외교관으로 훗날 일본의 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쳤으며, 유럽 악곡을 무단으로 사용한 일본 방송사 등에 고액의 사용료를 청구했다)와 일본 음악계의 싸움을 씹어 토해내듯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플라지는 대단한 사내야, 왜냐고? 그가 또다시 혼잣말처럼 그 이유에 대해서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내 여자가 미칠 듯 보고 싶어졌다. 나는 바바를 꼬드겼다. 환등을 보러 가자고 나지막이 말했다. 바바는 환등을 몰랐다. 그래, 좋았어! 오늘만큼은 내가 선배입니다. 팔십팔야니까 모셔다드리죠. 나는 멋쩍음을 숨기기 위해 농담을 던지며 플라지, 플라지, 하염없이 낮게 중얼거리는 바바를 억지로 자동차에 밀어 넣었다. 어서 갑시다! 아아, 늘 그렇듯 이 오카와강을 건널 때의 설렘이란. 환등의 거리. 이곳은 비슷한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사방팔방 이어져 있고, 골목 양쪽에 있는 집들의 한 자에서 두자 정도 되는 작은 창문으로 젊은 여자들이 화사하게 웃고 있다. 이 거리에 한 걸음 들어서면 어깨에 힘이 쑥 빠져나가고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망각한 채 추격을 따돌린 죄인처럼 아름답고 편안한 하룻밤을 보낸다. 바바는 이 거리가 처음인 것 같았으나, 딱히 놀라지도 않고 나와 조금 떨어져 느긋하게 걸으며 양쪽 작은 창문 너머로 여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골목을 빠져나와서는, 다시 골목을 꺾어 들어가 다다른 골목에 멈춰 서서 바바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해요, 꽤 오래전부터, 하고 속삭였다. 내 사랑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그마한 아랫입술만 살짝 왼쪽으로 움직여 보였다. 바바도 멈춰 서서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쑥 내밀어 여자를 뚫어지게 응시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를 돌아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이야, 닮았네, 닮았어.”
 
그때 처음 깨달았다.
 
“아뇨, 기쿠에겐 못 당하죠!”
 
나는 긴장해서 이상한 대답을 했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바바는 살짝 당황한 기색으로 “비교하면 안 되지.” 하며 웃었지만, 이내 험상궂게 눈살을 찌푸리며 “아니, 뭐든 비교해서는 안 돼. 비교 근성은 어리석고 못난 거야.” 하고 자신을 타이르듯 찬찬히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 잠자코 있었다. 한 마디라도 내뱉었다가는 주먹다짐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어색함이 맴돌았다. 자동차가 아사쿠사의 혼잡한 틈에 섞여 우리도 다른 이들처럼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을 때, 비로소 바바는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어젯밤에 여자들이 말이야. 나한테 이런 가르침을 줬어. 자기네들도 보이는 것만큼 편안하진 않다고.”
 
나는 애써 과장되게 웃었다. 바바는 전에 없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일본 최고의 거리야. 모두 가슴을 쫙 펴고 살아가잖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놀라워.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고 있어.”
 
그 후로 나는 바바와 가족처럼 허물없이 지내며 난생처음 친구를 얻은 기분마저 들었다. 친구를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도저히 입 밖에도 낼 수 없을 만큼 내가 생각해도 초라한 모습으로 차였기 때문에 나는 조금 유명해졌고, 결국 사노 지로라는 한심한 이름까지 얻게 되었다. 지금이니까 이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거지, 당시에는 웃을 일이 아니라, 죽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환등가에서 얻은 병도 낫지 않아 언제 망가질지 모르는 상태였고, 사람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도쿄에서 이천리 떨어진 혼슈 북단의 고향으로 돌아가, 진종일 뜰에 있는 밤나무 아래 등의자에 엎드려 담배를 일흔 개비씩 태워대며 멍하니 지냈다. 바바가 편지를 보내왔다.


사노 지로자에몬에게.
 
죽음만은 좀 기다려줄 수 없을까? 나를 위해서. 네가 자살했다면 나는, 아아, 나 보라고 일부러 그런 건가, 하며 은근히 자만했을 거야. 그래도 괜찮다면 죽어도 돼. 나 역시 예전에는, 아니 지금도 여전히 열심히 살고 있진 않아. 그렇지만 난 자살은 안 해. 누군가 우쭐대는 건 질색이거든. 병과 재난을 기다리지. 그런데 지금 내가 앓는 병은 치통과 치질이야. 죽기는 틀렸어. 재난도 여간해선 오지 않더라고. 밤새 방 창문을 열어 놓고서 강도의 습격을 기다리며 그에게 죽임을 당해야지 하는데, 창문으로 잠입하는 건 나방과 날개미와 딱정벌레, 그리고 백만 모기 군단뿐이야(, 아아, 나도 그래! 라고 하겠지). 나와 함께 책을 내는 게 어때? 난 책이라도 내서 빚을 모조리 갚은 다음, 사흘 내리 자만 자고 싶어. 빚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육신이야. 내 가슴에는 빚 구멍이 까맣게 뻥 뚫려 있어. 책을 냈다가 이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점점 더 깊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땐 또 어떻게든 되겠지. 어쨌든 나는 나 자신과 매듭을 잘 짓고 싶어. 책 제목은 해적. 구체적인 내용은 너와 상의한 후에 정할 생각이지만, 내 계획은 수출용 잡지를 만드는 거야. 프랑스가 좋겠지. 넌 어학 능력이 뛰어나니까 우리가 쓴 원고를 프랑스어로 번역해줘. 앙드레 지드에게 한 권 보내서 비평도 받자. , 발레리와 직접 논쟁할 수도 있을걸. 졸려 보이는 프루스트를 당황스럽게 만들어보자(, 유감이지만 프루스트는 이미 죽었어요, 라고 하겠지). 콕토는 아직 살아 있어. 라디게가 살아 있었음 좋았을 텐데. 데코브라 선생님께도 보내서 기쁘게 해드리자, 가엾게도.
 
이런 공상, 재밌지 않아? 실현하는 것도 딱히 어렵지 않아(쓰는 대로 글씨가 마르지. 편지글이라는 특이한 문체. 서술도 아니고, 회화도 아니고, 묘사도 아닌, 아주 묘한, 그러면서도 제대로 독립된 어쩐지 꺼림칙한 문체. 이런, 멍청한 소릴 했네). 어제 밤새도록 계산한 바에 의하면, 300엔이면 멋들어진 책을 만들 수 있어. 그 정도면 나 혼자서도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시를 써서 폴 포르에게 보여줘. 난 지금 해적의 노래라는 4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을 생각하고 있어. 완성되면 이 잡지에 발표해서 기필코 모리스 라벨을 당황하게 만들 거야. 거듭 말하지만, 실현은 그리 어렵지 않아. 돈만 있으면 돼. 실현 불가능할 게 뭐야. 너도 화려한 공상으로 가슴을 한껏 부풀려봐. 어때? (편지에는 어째서 늘 건강을 빌어야 할까? 머리가 나쁘고, 글을 못 쓰고, 말주변이 없어도 편지만은 잘 쓴다는 남자에 대한 괴담이 세상에 있어.) 난 편지를 잘 쓰는 것 같아, 못 쓰는 것 같아? 그럼 안녕.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지금 잠깐 떠올라서 적는다. 오래된 질문. ‘안다는 건 행복한가?’
 
바바 가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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