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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려라 메로스>

04. 다스 게마이네_“그래도 그 녀석의 그림만은 정정당당히 인정해줘야 해.”

by BOOKCAST 2022.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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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적

사타케는 작은 소리로 말하고 손목에 찬 금시계를 꽤 오래 바라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눈치였지만, “히비야에 신교향곡을 들으러 가려고. 고노에도 요새 상술이 좋아졌단 말이야. 내 옆자리엔 늘 외국인 아가씨가 앉는다니까. 요즘은 그게 낙이야.” 하고 말을 끝내자마자, 쥐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쫑쫑 달려갔다.
 
! 기쿠야, 맥주 좀 줘. 너의 미남이 가버렸어. 사노 지로, 마시자. 내가 시시한 놈을 끌어들였네. 말미잘 같은 놈. 저런 놈이랑 싸우면 별짓 다 해도 못 이겨. 손 놓고 가만있어도 내가 날린 주먹에 그냥 척 달라붙어 버린다고.”
 


바바는 갑자기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그 녀석, 기쿠 손을 막 움켜잡더라니까. 저런 놈이 남의 부인을 쉽게 가로채는 거야. 내심 고자가 아닐까 싶은데 말이야. , 이름만 친척이지 나랑은 완전 남남이야. 난 기쿠 앞에서 저런 놈과 논쟁하고 싶지 않아. 싸우기 싫어. 사타케의 그 하늘 높은 자존심만 생각하면 늘 소름이 돋는다니까.”
 
맥주잔을 쥔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 녀석의 그림만은 정정당당히 인정해줘야 해.”
 
나는 멍하니 있었다. 점점 어둑해지며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물들어가는 우에노 대로변의 혼잡한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바바의 혼잣말과는 천리만리 떨어진, 하찮은 감상에 젖어 들었다. “도쿄구나.”라는 딱 그 한마디만큼의 감상에.
 
그런데 그로부터 닷새 후, 우에노 동물원에 맥 한 쌍을 새로 들였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문득 맥이 보고 싶어져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동물원으로 갔는데, 그때 물새가 있는 커다란 철장 근처 벤치에 앉아 스케치북에 뭔가를 그리고 있는 사타케를 발견했다. 하는 수 없이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아아.”
 
사타케가 가볍게 외치고는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쪽이었어요? 깜짝 놀랐네. 여기 앉아요. 얼른 해치울테니, 그때까지만 잠깐만 기다려줘요. 할 말이 있거든요.”
 
사타케는 조금 서먹한 어조로 말하고는 연필을 고쳐 잡고 다시 스케치에 몰두했다. 나는 그 뒤에 서서 잠시 머뭇거리다 이윽고 마음을 다잡고 벤치에 앉아 사타케의 스케치북을 슬쩍 들여다봤다. 사타케가 곧바로 눈치를 채고, “펠리컨을 그리고 있어요.”라고 나지막이 말하며 펠리컨의 모습을 무섭도록 난폭한 필치로 빠르게 그려나갔다.
 
내 스케치를 한 장에 20엔 정도로 몇 장이든 사주는 사람이 있어서요.”
 
사타케는 혼자서 히죽히죽 웃었다.
 
난 바바처럼 아무렇게나 하는 말을 싫어해요. 황성의 달 이야기는 아직 안 하던가요?”
 
황성의 달이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안 했나 보군요.”
 
펠리컨의 뒷모습을 종이 한구석에 큼직하게 그리면서 말을 이었다.
 
바바가 옛날에 다키 렌타로라는 익명으로 <황성의 달>이라는 곡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일체의 권리를 야마다 고사쿠에게 3천 엔에 팔아넘겼죠.”
 
그 유명한 <황성의 달> 말인가요?”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 거짓말이에요.”
 
한바탕 부는 바람에 스케치북이 훌훌 넘어가면서 여자의 나체와 꽃 데생이 드문드문 보였다.
 
바바는 헛소리하기로 유명해요. 교묘하기까지 하고 말이죠. 누구나 처음에는 깜빡 속아요. 요제프 시게티도 아직인가요?”
 
그 얘긴 들었어요.”
 
나는 슬펐다.
 
그 후렴구 딸린 문장 말이죠?”
 
사타케는 뻔하다는 듯 말하며 스케치북을 탁 덮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좀 걸어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보려고 했던 한 쌍의 맥은 포기해야겠다. 그리고 바바보다 더 이상해 보이는 이 사타케라는 남자의 말을 들어봐야겠다. 물새 철장을 지나고 물개 수조 앞을 지나서 작은 산처럼 거대한 불곰 우리 앞에 다다랐을 무렵, 사타케는 이야기를 꺼냈다. 전에 하도 이야기해서 익숙한 암송 같은 어조라서, 문장으로 옮기면 다소 열기를 띤 말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사타케 특유의 탁하고 음침한 저음의 소리를 졸졸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다.
 
바바는 완전히 글렀어요. 음악을 모르는 음악가도 있나요? 전 그 녀석이 음악에 대해 논하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죠. 바이올린도 마찬가지예요. 작곡요? 악보에 그려진 콩나물 대가리나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바바 집은 저 녀석 때문에 눈물바다예요. 도대체가 음악학교에 들어간 건 맞는지 그조차 확신하지 못해요. 옛날에는 말이죠, 그래도 소설가가 되려고 공부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아무것도 쓸 수 없다나 뭐라나. 얼뜨기 같은 놈. 요새는 또 자의식 과잉이라는 말을 하나 배웠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는 것 같더라고요. 전 어려운 말은 잘 못 하지만, 자의식 과잉이라는건, 예를 들자면 길 양쪽에 수백 명의 여학생이 길게 줄지어 있는데, 그곳에 우연히 접어들어서는 그사이를 홀로 어기적어기적 지나갈 때 일거수일투족이 어색하고 시선과 고개 위치 모두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그런 마음 아닌가요? 만일 그렇다면 자의식 과잉이라는 건, 실은 칠전팔기와도 같은 고통이라서, 바바처럼 저런 쓸데없는 헛소리를 해대진 못할 텐데요. 우선 잡지를 낸다며 들떠 있는 꼴부터 이상하지 않아요? 해적? 뜬금없이 해적이라뇨. 혼자 신이 났다니까요. 그쪽도 바바를 너무 믿었다간 나중에 큰 코다칠 겁니다. 그건 내게 확실히 예언해두죠. 내 예언은 잘 들어맞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전 바바를 믿습니다.”
 
흐음, 그래요.”
 
사타케는 내가 마음을 담아 꺼낸 말을 무표정하게 흘려들으며 말했다.
이번 잡지도 전 철두철미하게 믿지 않아요. 나더러 50엔을 내놓으라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왁자지껄 떠들고 싶은 거라고요. 성실이라곤 티끌만큼도 없어요. 그쪽은 아직 모를 수도 있는데, 내일모레, 바바와 저, 그리고 바바가 음악학교 어떤 선배에게 소개받아 알게 된 다자이 오사무라는 젊은 작가까지 셋이서 그쪽 하숙집에 가기로 했는데 말이죠. 거기서 잡지의 마지막 플랜을 세운다고 했습니다만…… 글쎄요. 우리가 그때 잔뜩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면 어떨까요? 찬물을 확 끼얹는 거죠. 제아무리 멋진 잡지를 내놓는다 한들 세상은 우리를 근사하게 봐주질 않아요. 죽기 살기로 해봤자 중간에 내던져질 거예요. 저는 비어즐리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열심히 그림을 그려서 비싼 값에 판 돈으로 즐긴다, 그거면 충분해요.”
 
말이 끝난 곳은 살쾡이 우리 앞이었다. 살쾡이는 파란 눈을 번뜩이며 등을 동그랗게 만 채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타케는 조용히 팔을 뻗어 피우던 담뱃불을 살쾡이의 코에 갖다 댔다. 사타케의 모습은 바위처럼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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