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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려라 메로스>

03. 다스 게마이네_나폴리를 보고 나서 죽어라!

by BOOKCAST 202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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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적

Pirate라는 단어는 저작물을 표절한 사람을 가리킬 때도 쓰이는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냐고 내가 묻자, 바바는 즉시 더 재밌겠다고 대답했다. Le Pirate, 일단 잡지 이름은 정해졌다. 말라르메나 베를렌이 관여한 <La Basoche>, 베르하렌 일파의 <La Jeune Belgique>, 그 외 <La Semaine>, <Le Type> 모두 이국의 예술 정원에 핀 새빨간 장미꽃이다. 과거 젊은 예술가들이 세상에 알린 기관 잡지. 아아, 우리도 해보자! 여름방학이 끝나 서둘러 상경했더니 바바의 해적 열기는 더욱더 뜨거워져 있었고, 마침내 나까지도 감염되어 우리는 모였다 하면 <Le Pirate>에 대한 화려한 공상을, 아니 구체적인 계획을 주고받았다. , 여름, 가을, 겨울, 1년에 네 번씩 발행. 국배판 60. 전부 아트지. 클럽 회원은 해적 유니폼을 입고 가슴에는 꼭 제철에 맞는 꽃을 꽂을 것. 회원 암호는 절대 맹세하지 마. 행복이란? 심판하지 말지니. 나폴리를 보고 나서 죽어라!’ 등등. 동지는 반드시 20대의 미청년이어야 할 것. 어느 한 가지에 뛰어난 기량을 갖출 것. <The Yellow Book>의 옛 지혜를 본받아 비어즐리에 필적하는 천재 화가를 찾아내 삽화를 그리게 할 것이다. 국제문화진흥회 따위에 의지하지 말고 이국땅에 우리의 예술을 우리 손으로 알릴 것이다. 자본금은 바바가 200, 내가 100, 그리고 다른 동지들로부터 200엔 정도를 받을 예정이다. 동지, 바바가 그의 친척뻘인 시타케 로쿠로라고 하는 도쿄미술학교의 학생을 우선 내게 소개하기로 했다. 그날 나는 바바와 한 약속대로 오후 4시경에 우에노 공원에 있는 기쿠가 있는 단술집을 찾았는데, 바바가 잔무늬가 들어간 감색 홑옷에 통이 넓은 무명 바지라는 유신 시대 같은 차림새로 양탄자 깔린 평상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바 발치에 새빨간 삼잎 무늬 허리띠를 매고 하얀꽃 비녀를 꽂은 기쿠가 쟁반을 들고 웅크리고 앉아 바바의 얼굴을 쳐다보며 움쩍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바바의 검푸른 얼굴에는 희미한 석양이 비쳐들고 자욱이 피어오른 저녁 안개가 두 사람 주위를 감싸고 있어 뭔가 기묘한 풍경을 자아냈다. 내가 다가가 왔어요?” 하고 바바에게 말을 걸자, 기쿠가 .” 하고 작게 외치며 벌떡 일어나 돌아서서 내게 하얀 이를 보이며 인사했는데, 금세 둥그런 두 뺨을 붉혔다. 나도 조금 당황해서, “내가 뭐 잘못했나?” 하고 말하자, 기쿠는 순간 표정을 싹 바꾸어 묘하게 진지한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휙 내게서 등을 돌리고 쟁반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가게 안으로 달려가버렸다. 꼭두각시 인형 놀음이라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의아해하며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 평상에 앉으니, 바바가 히죽히죽웃으며 입을 열었다.
 
완전히 믿다니. 그런 모습은 역시나 재밌단 말이지. 저 아이 말이야.”
 
과연 백마교불행 찻잔이 창피했는지 벌써 어디다 치우고, 지금은 여느 손님들처럼 가게의 청자 찻잔을 쓴다. 바바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내 수염을 보고 며칠이나 지나야 이렇게 자라냐고 묻길래, 이틀쯤 지나면 이렇게 자란다, 잘 봐봐라, 수염이 뻗어나오는 게 눈으로도 보일 지경이다, 라고 진지하게 말하니까 가만히 앉아서 내 턱을 접시 같은 댕그란 눈으로 빤히 쳐다보잖아. 놀랐어. 무지해서 믿는 건가? 아니면 똑똑해서 믿는 건가?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이나 한 편 써볼까? A B를 믿어. 거기에 C, D, E, F, G, H, 그 밖에 수많은 인물이 잇따라 등장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B를 모함하지. 그런데도 A는 여전히 B를 믿어. 의심하지 않아. 절대로 의심 안 해. 흔들리지 않지. A는 여자, B는 남자. 따분한 소설이네. 하핫.”
 
이상하게 들떠 있었다. 나의 그의 말을 그저 듣기만 할 뿐, 그의 심중을 딱히 추측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당장 보여줘야겠다 싶었다.
 
그 소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써보지 그래요?”
 
그래서 최대한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말하고는 눈앞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움이 됐나 보다. 바바는 평소의 불만 가득한 표정을 쉽게 되찾았다.
 
근데 난 소설을 못 써. 넌 괴담을 좋아하나 보다?”
 
, 좋아하죠. 괴담이 제 상상력을 가장 많이 자극하는 것 같아요.”
 
이런 괴담은 어때?”
 
바바는 아랫입술을 핥았다.

지성의 극치란 건 분명히 있어.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무간나락이지. 그곳을 살짝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돼. 펜을 들어도 원고지 구석에 자기 얼굴이나 끼적댈 뿐, 한 자도 쓸 수 없는 거지. 그 와중에도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어떤 소설을 몰래 구상해. 구상하자마자 갑자기 온 세상 소설이 지루하고 따분해져. 그건 정말 무시무시한 소설이야.

 

 

가령 모자를 비스듬히 써도 거슬리고, 푹 눌러써도 불안하고, 큰맘 먹고 벗어봐도 찜찜할때, 사람은 어디쯤에서 위치의 안정을 얻을 것인가 하는 자의식 과잉 통일 문제 등에 대해서도 이 소설은 바둑판 위에 놓인 바둑알처럼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명쾌한 해결책? 아니. 무풍, 세공 유리, 백골, 맑고 깨끗한 해결이야. 아니, 아니지. 그런 형용사도 없는 그냥 해결이다. 그런 소설은 분명 있어. 하지만 사람은 일단 이 소설을 구상한 날부터 점점 야위다가 막판엔 미치거나 자살하거나 말을 못 하게 돼. 라디게는 자살했잖아. 콕토는 미쳐서 밤낮없이 아편만 피워댔고, 발레리는 10년 동안 말을 못 했다나. 이 단 한 편의 소설을 둘러싸고 일본에서도 한때 굉장히 비참한 희생자가 나왔어. 실제로 말이야…….”
 
어이, 저기.”라는 쉰 목소리가 바바의 이야기를 방해했다. 흠칫 놀라 돌아보니 바바의 오른편에 코발트색 교복을 입은 키가 아주 작은 청년이 가만히 서 있었다.
 
늦었잖아.”
바바는 꾸짖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 제국대생이 사노 지로자에몬. 이 녀석은 사타케 로쿠로. 전에 말한 그 화가 말이야.”
 
사타케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눈인사를 나눴다. 사타케의 얼굴은 주름과 모공이 하나도 안 보여 반질반질 닦인 우윳빛 가면 같았다. 눈동자 초점이 또렷하지 않아 유리로 만든 눈알 같았고, 코는 상아 세공처럼 차가웠으며, 콧날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눈썹은 버드나무의 잎처럼 길고 가늘었으며 얇은 입술은 딸기처럼 붉었다. 그렇게 현란한 얼굴에 비하면 팔다리가 어찌나 빈약하던지 이 또한 놀라울 따름이었다. 키는 150센티미터도 채 안 될 듯했고, 마르고 작은 손은 도마뱀을 떠올리게 했다. 사타케는 선 채로 늙은이처럼 생기 없는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을 건넸다.
 
바바한테 얘기 들었어요. 호된 일을 당했다면서요. 제법이구나 싶었는데 말이죠.”
 
나는 욱해서 사타케의 부시도록 하얀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봤다. 그는 상자처럼 무표정할 뿐이었다.
 
바바는 큰 소리로 혀를 끌끌 차며 , 사타케. 그만 놀려.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놀리는 건 비열하단 증거야. 욕할 거면 화끈하게 퍼부으라고.”
 
놀리는 거 아닌데 말이야.”
 
조용히 답하며 가슴 주머니에서 보랏빛 손수건을 꺼내 목 주위의 땀을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
 
으휴!”
 
바바는 한숨을 푹 내쉬며 평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넌 말끝에 그 말이야 말이요 같은 걸 안 붙이면 말을 할 수 없는 거냐? 어미에 그 감탄사 같은 것 좀 붙이지 마. 피부에 끈적끈적 들러붙는 것 같아서 질색이거든.”
 
내 생각도 그랬다.
사타케는 손수건을 고이 접어 가슴 주머니에 넣으면서 남 일처럼 중얼거렸다.
나팔꽃 같은 낯짝 주제라고 할 줄 알았는데.”
 
바바는 슬며시 일어나 조금 소리 높여 말했다.
너랑 여기서 말다툼하고 싶지 않아. 둘 다 계속 제삼자를 계산에 넣고 말하고 있잖아. 그치?”
 
뭔가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사타케는 도자기처럼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이제 용건 다 끝났지?”
 
그래.”
 
바바는 과장되게 곁눈질하며 어색한 하품을 해댔다.

그럼 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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