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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청와대 마지막 대통령, 5년의 외교 비하인드>

01. 제가 잘하고 있는 거죠? 도보다리 브로맨스

by BOOKCAST 202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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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잘하고 있는 거죠?”
도보다리 브로맨스

핵실험부터 ICBM, 선제타격론 등 수많은 고비와 긴장 끝에 찾아온 2018년은 그야말로 ‘한반도의 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길지 않은 그 기간에 펼쳐졌던 역사적 장면들이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2018년 4월 27일.

경기도 고양시에 마련된 ‘남북 정상회담 프레스센터’는 국내외 3천여 명의 취재진으로 가득 찼다. 정말 취재 열기가 느껴지는 그야말로 ‘현장’이었다. 남북 정상이 정상회담을 하는 곳은 판문점이었지만 모든 취재진이 판문점에 가 있을 수 없는 만큼 이런 대형 이벤트가 있을 때 기자들은 ‘풀’이라는 걸 만든다. 즉, 해당 행사에 기자단 대표로 가서 현장 모습을 기록하고 취재한 뒤 기자단에게 전달해 주는 방식이다.

남북 정상회담의 경우, 청와대 기자단에서 대표 ‘풀단’을 구성한다. 때문에 몇 명의 기자들을 빼고는 전부 프레스센터에서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현장 화면을 봐야 했다. 프레스센터에는 대형 스크린 2개가 설치되었고 이 스크린을 통해 판문점 현장 화면이 중계됐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방송사들은 센터 곳곳에 마련된 방송 무대에서 중계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분주하게 돌아가던 프레스센터가 ‘일시 정지’ 된 순간이 있다.

9시 28분.

판문점 북측 구역인 판문각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프레스센터에선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었을 거다. 김정은이 북한 매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눈앞에 실제 나타났다는 것에 대한 신기함. 그리고 ‘정말 남북 간에 뭔가가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라는 기대감. 이런 감정들이 뒤섞인 듯했다. 김정은이 판문각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얼굴에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손을 맞잡았다. 프레스센터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 소리로 요란했다. 두 정상은 손을 맞잡고 대화를 나눴다.

사실 당시 프레스센터에선 아무리 귀를 기울인다고 해도 두 정상의 대화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아 답답했다. 이후에 다 알려진 내용이지만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남측에 오시는데 나는 언제쯤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을 건넸고, 이에 김 위원장이 “그럼 지금 넘어가 볼까요?”라고 했단다. 그러면서 예정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의 손을 이끌고 군사분계선을 살짝 넘어갔다가 온 거다. 그가 정말 쇼맨십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이때 처음 느낀 것 같다. 사실 그전까지 북한 매체를 통해 보이는 게 다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연출된 모습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제 ‘라이브’ 상황에서 김 위원장을 겪어보니, 그의 제스처들은 마치 잘 써진 각본 같았다. 애드리브에 강한 스타일이라고 할까? 아무튼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도 김정은의 쇼맨십이 드러나는 사례들은 여러 차례 있었다.

 

2018년 4월 프레스센터에서 지켜본 남북 정상회담 장면
 

이날 정상회담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도보다리’였다. 이 ‘역사적 장면’을 만든 사람은 윤재관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이다. 청와대 의전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있으면서 ‘도보다리’ 아이디어를 냈고, 이후 그 공을 인정받아 부대변인이 됐다. 부대변인으로 발탁된 뒤 처음 기자들 앞에 섰을 때의 소감도 “소통의 도보다리를 놓겠다”였다. 내 사견으로는 ‘도보다리’라는 장소를 생각해낸 것도 좋았지만, 특히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건 곁에 수행비서조차 없이 ‘단둘’이서만 이 다리에서 산책하게 했다는 점이다.

두 정상이 산책하는 동안 프레스센터에 있던 기자들은 대형 스크린을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최대 관심사는 당연히 ‘두 정상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가’였지만 불행히도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새들이다. 특히 두 정상이 도보다리 한 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눌 때는 새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나중에 언론들은 김 위원장의 ‘입 모양’ 판독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정면으로 카메라에 잡힌 건 단 4분이었는데, 이때 김 위원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입 모양을 통해 분석한 것이다. 독순술 전문가들은 ‘트럼프’, ‘핵 같은 것을’, ‘관광사업별로 뭔가’, ‘아버지가 저 여자랑 결혼하라고’ 등을 읽어냈다. 특히 ‘도보다리 밀담’에서는 김위원장이 주로 묻고, 문 대통령이 대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상 간 대화이지만 나이 차도 많고 연륜도 달라서 형과 아우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회담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뒤, 한 관계자에게 이런 말을 전해 들었다. 당시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제가 잘하고 있는 거죠?”라고 물어보았단다. 물론 도보다리 위엔 북한 사진사만 있었기에 정확한 문장은 아닐 수 있다. 다만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문 대통령에게 했다는 것인데, 그만큼 김정은 본인도 전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 자체가 매우 부담스러웠던 걸로 보인다. 본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걷지 않았던 길을 처음 가보는 것이니 말이다.

도보다리에서 나눈 이야기를 이후에 어떻게 정리했는지도 궁금했다. 통상의 정상회담이었다면 당연히 옆에 속기사가 자리하고 이후 속기록이 정리됐을 텐데, ‘도보다리 밀담’ 때는 새와 사진사 외엔 주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알아보니, 이때 오간 내용을 정리하기는 했는데 오롯이 문 대통령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회담이 끝나고 나서 대통령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주요 참모들과 공유했고, 이때 간이 속기록 형태로 당시 나눴던 대화 내용이 정리됐다는 것이다. 이 기록물은 15년∼30년 후에나 공개되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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