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하노이 거리 곳곳엔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얼굴로 도배가 돼 있었다. 도로마다 화단도 만드느라 분주했다.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역사적 만남이 이뤄지는 것인 만큼 시민들도 기대 반, 설렘 반인 것 같았다. 이번 만남이 두 정상 간 두 번째이긴 하지만 처음과는 또 많이 다른 분위기였다. 첫 만남에서야 ‘만남’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크고 그야말로 ‘신기’했지만 두 번째 만남은 좀 달라야 했다. 미국에게도 북한에게도 ‘성과’가 중요했다.
내 역할도 첫 싱가포르 회담 때와는 달라졌다. 싱가포르 회담에서는 청와대 출입기자로 출연 및 앵커를 담당했지만 하노이 회담에서는 외교안보팀장으로서 사실상 기자들의 업무 총괄을 맡아야 했다. 책임도 좀 더 무거워졌기에 기자들의 기사 아이템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재밋거리와 주변 취재도 필요했지만 우선 가장 중요한 아이템 자체는 ‘하노이에서 미국과 북한이 뭘 주고받을 것이냐’였다.
1순위로 거론된 것이 ‘영변 핵시설’이었다. 평안북도에 위치한 영변은 북한 핵개발의 심장이라고 불린다. 가장 대표성을 띠고 있는 시설인 만큼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어떻게 내놓을지, 미국이 과연 이를 받고 뭘 줄 수 있을지 등이 관심사였다.

2019년 2월 28일 오후 12시경, 나는 하노이 현지 스튜디오에서 뉴스특보에 출연 중이었다. 앵커와 전문가와 함께 전날 저녁에 있었던 하노이에서의 북미 정상 만남과 오전에 있던 확대정상회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잠시 뒤로 예정된 오찬과 합의문 서명식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12시가 넘도록 스튜디오에 들어오는 오찬장 화면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정상 간 오찬인 만큼 시간약속은 웬만해서는 지켜지게 돼 있고, 정상들이 늦더라도 관계자들은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냈어야 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순간 ‘이건 뭔가 잘못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튜디오 안에서 방송하면서 바깥 상황 파악을 위해 현장에 나가 있는 기자들에게 상황 보고를 재촉했다. 하지만 다들 ‘분위기가 이상하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12시 40분경, 정상회담장인 메트로폴 호텔 인근에서 도로통제가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두 정상이 자리를 뜨려는 정황이 포착된다는 것이다. 방송 중이던 나는 일단 상황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했다. 다만 단정적으로 ‘회담이 결렬된 것 같다’라고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잠시 뒤, 백악관 대표 취재기자의 메시지가 전달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당초 예정된 4시에서 2시로 당기고, 공동서명식 개최는 불투명하다는 내용이었다. 나를 포함한 현장에 있던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백악관 기자의 메시지를 보니 회담 결렬이 거의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공식 결렬 선언은 나오지 않았기에 방송에서는 수위 조절을 하면서 ‘결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라는 식으로 일단 시청자들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사실 하노이 회담 결렬 배경은 이렇다. 북한은 가장 중요한 핵시설 중 하나인 ‘영변’을 내놓기로 마음먹고 하노이에 왔다. 그렇게 마음먹기까지 뒤에서 큰 역할을 한 건 우리 정부다. 영변을 포기하면 미국이 그에 맞는 보상을 해줄 것이라고, 북한을 안심시켰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우리 정부도, 북한도 간과한 부분이 있다면, 미국이 그걸로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정상 간 회담이 이뤄지기 전에는 정상들이 서명할 결과물을 최종 조율해놓는 게 통상적이다. 그런데 큰 틀에서의 조율만 해둔 채 정상 간 서명할 부분은 남겨둔 것이 큰 실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장을 박차고 나온 뒤 기자회견에서 ‘영변보다 플러스알파를 원했냐’라는 질문에 “더 필요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나오지 않은 것 중에 우리가 발견한 것들도 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라며 영변 이외에도 큰 핵시설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즉 ‘영변’이라는 카드 하나를 들고 60시간 이상 기차를 타고 온 김정은 위원장에게 트럼프 대통령은 ‘영변은 당연한 것이고, 이것도 같이 내놔’라고 한 것이다. 이에 김정은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고, 그에 비해 미국은 그다지 급할 게 없었던 거다. 트럼프가 모두 기대하던 ‘영변’ 하나 받고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누가 그를 칭찬해줄 리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트럼프가 하노이에 있던 기간 중 미국에서는 트럼프의 집사 역할을 하다 관계가 틀어진 코언 변호사의 청문회가 한창이었다. 코언이 계속 불리한 증언을 내놓고 있던 만큼 트럼프에겐 하노이 회담보다 더 신경이 쓰였던 것이 코언이었던 거다. 김정은과의 회담에서 아무리 좋은 성과를 얻어 돌아간다고 한들, 미국 내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변’ 하나 받아가느니 ‘결렬’이라는 선택이 오히려 여론의 시선을 분산시키기에도 좋았던 것이다. 미국에 돌아가서 ‘북한이 핵시설의 심장인 영변을 내놨지만 내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걸 요구했고, 김정은이 내놓지 않아서 결렬시키고 왔다’라고 하면 비난할 미국인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회담 결렬’이라는 미국의 초강수를 사전에 예고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 정부도 ‘결렬’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결렬’ 가능성이 ‘제로’였던 것은 아니어서, 외교부도 청와대에 보고하기는 했다. 다만 그 자체를 부각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상컨대 보고서에 썼더라면 여러 내용을 담은 뒤 마지막 장에 8폰트의 잘 안 보이는 작은 글씨로 ‘결렬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나 희박함’ 정도로 끼워 넣지 않았을까?
어쨌든 김정은 위원장에게 ‘하노이 결렬’은 큰 충격이었을 테고, 이를 지켜본 우리 정부도 속을 끓이기는 마찬가지였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여파는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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